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는 창작물의 한 장르가 됐다. 세상 종말을 그리는 <성경> 마지막권 요한계시록의 영어명 'Apocalypse'에 그 이후를 뜻하는 'Post'를 붙인 것으로, 종말 뒤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일컫는다. 오늘의 세상, 국가와 사회, 질서와 도덕이 무너진 뒤의 파국을 그린단 점에서 인간의 본성이 전면에 드러나는 장르로 꼽힌다.

인간이란 재난 가운데 제 본성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갖춰진 세상에선 여유롭고 도덕적인 모습을 가장할 수 있으나, 열악한 환경 가운데선 진면목이 드러날 밖에 없다는 얘기다. 군자인 척 하던 이도 사흘쯤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는데, 그 사흘의 굶주림을 작품 속 배경을 통해 부여하는 게 이 장르의 특징이다. 누군가는 담을 넘고, 누군가는 넘지 않는다. 담장을 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가 있고, 넘은 뒤 오래 괴로워하는 이가 있다. 그 차이가 인간의 격, 인격을 말한다. 어쩌면 인격 밑바탕의 본성일 수도 있겠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다루는 대재앙 가운데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본질, 또 그 격을 확인하는 것, 대중이 이 장르를 즐기는 가장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워킹 데드 포스터
워킹 데드포스터AMC

가장 성공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드라마

<워킹 데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중에서도 단연 성공한 작품이다. 미국 케이블채널인 AMC가 제작한 시리즈는 케이블을 넘어 전미 TV드라마 전체 가운데서도 인기와 관련된 기록 상다수를 새로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지역과 정치색, 세대를 막론하고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를 꼽을 때 <워킹 데드>가 빠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10여 년 동안 11개 시즌이 나올 만큼 활발히 제작된 데도 이 같은 인기가 바탕이 됐다.

작품은 시즌을 거듭하며 보다 깊은 이야기로 나아간다. '워커'라 부르는 좀비들이 인간을 잡아먹고,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붕괴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처음엔 이전 세상의 규칙들, 이를테면 도덕과 윤리, 법 따위의 것들이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과 맞지 않는 순간이 적잖다. 사람들은 조금씩, 급기야는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가치를 저버리기도 한다.

첫 시즌이 사태가 발발한 이후의 상황과 주인공 일행의 성격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면, 시즌2는 생존자들이 이룬 무리의 권력관계와 그를 이끄는 리더의 고충을 담아낸다. 그리고 오늘 '씨네만세'에서 다룰 시즌3에 이르러서 주인공 무리와 그 바깥의 또 다른 무리를 대비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서로 다른 리더가 이끄는 무리의 다른 특성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고, 향후 작품의 주된 양식이 될 수 있는 다른 집단들의 존재와 그들과의 관계성을 처음으로 활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워킹 데드 스틸컷
워킹 데드스틸컷AMC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들의 이야기

<워킹 데드> 시즌3는 지난 시즌 머물렀던 농장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개척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릭 그라임스(앤드류 링컨 분)가 이끄는 무리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에서 희망을 찾는 데 실패하고, 다음으로 기대를 걸었던 군사기지 포트베닝(Fort Benning) 조차 폐허가 되었단 사실을 접한다. 지난 시즌 우연히 당도했던 허셸 그린(스콧 윌슨 분)의 농장 또한 좀비들의 출몰로 포기한 상태다.

그러나 무리는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속속 옛 집결지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상의 무엇, 무리 사이에 공유되는 동료라는 정체성이 확고히 자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즌3에서 릭은 이들을 이끌고 새로운 정착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폐허가 된 농장보다 안전한 곳,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할 수 있는 곳, 다름 아닌 교도소다.

모두 16개 에피소드로 이뤄진 긴 시즌이다. 불안정환 환경 가운데 임신한 아이를 출산해야 하는 릭의 아내 로리(사라 웨인 콜리스 분)의 이야기, 스스로 손목을 자른 채 사라졌던 멀 딕슨(마이클 루커 분)의 귀환과 그가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 또 동생인 데릴 딕슨(노먼 리더스 분)과의 관계, 무리로부터 낙오됐던 안드레아(로리 홀든 분)가 다른 무리에서 펼치는 활약, 또 그녀와 특별한 관계를 갖는 새로운 인물 미숀(다나이 구리라 분)의 등장, 릭의 무리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타이리스(채드 콜먼 분)와 사샤(소니콰 마틴-그린 분) 남매 등 다양한 이야기가 각 에피소드를 채운다.

전체 시리즈는 상술한 다양한 이야기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서 릭의 무리와 외부의 적대무리가 부딪는 과정으로 흘러간다. 교도소를 개척하고 안전한 터전을 확보하여 한숨 돌릴 찰나, 그들을 공격하려 드는 새로운 세력을 내보이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좀비가 아닌 인간, 내부의 불안이 아닌 외부의 위협을 다루는 순간이다.

워킹 데드 스틸컷
워킹 데드스틸컷AMC

견디는 자와 속이는 자, 누가 해답인가

빌런이라 해도 좋을 외부의 지도자는 가버너(데이비드 모리시 분)라 불리는 사내다. 릭의 무리에서 낙오됐던 안드레아와 그 동료 미숀을 가버너의 무리가 구조하고 저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가운데, 가버너가 이끄는 우드버리 마을의 본색이 차츰 드러난다. 우드버리는 이제 막 교도소에 정착해 가진 자원이라곤 교도소가 보유하고 있던 식량과 연료 정도가 고작인 릭의 집단에 비해 훨씬 더 부유하고 안정된 상태다. 그건 이들이 머무는 곳이 본래 사람들이 거주하던 마을인 탓이고, 마을 경계를 높은 장애물로 둘러싸 요새화시켜놓은 덕이며, 무엇보다 릭의 무리 수배에 달하는 주민들을 통하여 나름대로 생산과 안보, 질서유지까지를 수행하고 있는 때문이다.

시즌3는 인근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나타날 때마다 그를 습격해 살해하고 물자를 탈취해온 가버너 무리의 실체를 조금씩 내보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제가 다스리는 우드버리 주민들에게 쉬쉬한 채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처럼 저를 꾸미는 모습을 차츰 드러낸다. 그로부터 우드버리는 지금의 힘을 얻었으나 불안 또한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한다.

시즌3의 핵심은 릭과 가버너라는 두 리더의 대비다. 권력을 원한 적 없으나 제게 기대온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또 살아남기 위하여 리더 역할을 해온 릭이다. 그 과정에서 절친했던 친구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고, 적잖은 이들이 희생되는 결단도 내려야 했다. 릭은 다른 이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대신 이끄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나온 결코 쉽지 않은 고난들이 그로 하여금 리더의 자리에 무겁게 느끼도록 한다.

워킹 데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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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좀비물로부터 현실을 떠올리다

반면 가버너는 철저히 제가 이끄는 이들을 속이기를 선택한다. 확고한 리더십을 세워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있지만, 실상은 온갖 부조리한 결정들로 내부인들까지 거침없이 희생시켜왔던 것이다. 다수에겐 평화와 안락을, 그러나 거슬리는 이들에겐 죽음을 가버너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내린다. 무리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사실을 조작하고 은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다른 이들에게 감춰야 할 사연 또한 가지고 있다. 마치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영탁(이병헌 분)을 보는 듯, 그는 제 무리에 속한 이들에게 안전과 안락을 제공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했다고 믿는다. 무리의 운명은 오로지 제가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이다. 무리가, 그를 효율적으로 기능케 하는 리더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음을 <워킹 데드>는 앞선 시즌을 통해 내보였다. 시즌3는 '그렇다면 어떤 리더여야 하는가'를 고심케 한다. 위태로운 환경과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서 리더십을 구축하고 무리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리더란 어떤 덕목을 갖춘 이인지를 확인케 한다.

한국사회, 나아가 오늘의 공화정, 인류문명 전체가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다.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리더와 리더십을 찾아 헤맨다. 불행히도 국제사회와 국내정치를 돌아보자면 인류는 최적의 리더를 골라내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듯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리더를 찾아야 하는지를 <워킹 데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 가운데서 확인케 한다. 그를 따르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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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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