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로 첫 장편영화 주연을 맡은 25세 마이키 매디슨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최대 이변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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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순간을 특별히 요약해 기술하자면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아노라>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칸영화제의 주역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선전하리라 예상했으나 오스카레이스 중반까지만 해도 <아노라>가 핵심 부문 대다수의 주인 자리를 차지할 만큼 강세를 보일 것이라 확신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배우조합, 감독협회, 촬영감독협회 등 부문별 직능단체 관계자가 회원으로 등록된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회원들이 투표해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을 가린다. 이때 투표를 전후해 투표권자를 대상으로 각 영화 관계사가 로비에 가까운 유세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명 '오스카 레이스'라 불리는데, 소수의 심사위원단이 선정작을 가리는 유럽 유수의 영화제들과는 극명하게 다른 체제다. 이 점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이 대중적이란 평가와 함께 유행과 경향성, 각종 이슈에 민감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초 6개 부문 수상 후보에 올랐던 <아노라>가 5관왕을, 그것도 주요 부문을 싹쓸이에 가깝게 가져간 사실은 여러모로 놀랍게 다가온다. 성소수자 캐릭터를 실제 트랜스젠더 배우가 연기한 <에밀리아 페레즈>가 전통적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이 선호해온 경향성을 확실히 따르고 있는 데다, 작품성 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단 점에서 주요 부문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최다인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에밀리아 페레즈> 외에도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루탈리스트>는 최근 경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영화계에 다수 포진한 유대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강력한 후보로 꼽혔다. 훌륭한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 또한 뛰어난 수준이란 평가를 받는 <콘클라베>는 서사의 완결성 측면에서 경쟁작에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에밀리아 페레즈'의 추락
▲제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에밀리아 페리즈>에 출연한 조 샐다나가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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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는 영화제 두 번째 특징적 순간이기도 한 <에밀리아 페레즈>의 추락에서 비롯됐다. 기존 영화계의 통념을 깨뜨린 트랜스젠더 범죄 조직 보스란 캐릭터와 실제 트랜스젠더 배우의 기용이란 결정이 이 영화를 강력한 후보로 밀어 올렸지만, 바로 그 결정이 독으로 작용한 것이다. 오스카 레이스를 전후해 주연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과거 SNS에 지속적으로 혐오 표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가뜩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한 투표권자들의 반감을 산 것이다.
인종 비하는 물론이고 이슬람과 기독교, 천주교를 비난하며 코로나19와 관련한 음모론까지 수차례 언급한 SNS 게시글은 투표권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던졌다. 감독 자크 오디아르를 비롯한 제작진이 즉각 비판 성명까지 냈지만, 한 번 돌아선 여론은 뒤집히지 않았다. 작품성만큼이나, 작품 외적인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할리우드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된 사례다.
이날 행사장에서도 <에밀리아 페레즈> 후보들이 소개될 때마다 싸늘한 반응이 돌아와 여론을 짐작케 했다. 할리우드 집단지성의 반영이라 해도 좋을 아카데미 시상식의 체계를 감안하면 <에밀리아 페레즈>가 여우조연과 주제가상이라도 건진 게 다행일 정도다.
무시할 수 없는 후보였던 <브루탈리스트>는 배우들의 발음 교정 등의 작업에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공개되며 타격을 입었다. 영화 제작 과정, 특히 연기 부문에서 AI의 활용을 적대시하고 있다 해도 좋을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2관왕이라도 한 것이 다행이란 평가다. 결국 <에밀리아 페레즈>와 <브루탈리스트>의 공백이 <아노라>의 성취로 직결됐단 해석에 설득력이 있다.
데미 무어 수상실패의 이변
▲서브스턴스스틸컷NEW
올해 시상식 최대 이변은 전 부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서브스턴스> 데미 무어의 여우주연상 수상 실패다. 이 부문 또한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에 돌아갔는데, 성 노동자의 노동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한 이 작품의 의미와 몰입도 있는 연기력을 감안해도 의외란 평가다.
무엇보다 <서브스턴스>가 드물게 색깔 강한 창의적 작품이란 점, 영화 속 캐릭터가 데미 무어의 삶과 필모그래피 전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 그 덕분인지 그녀의 연기력 또한 더 나은 모습을 상상키 어려울 만큼 훌륭했단 점에서 수상에 실패한 이유가 충격으로 다가온다. 적잖은 영화 팬이 수상 결과를 수긍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는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 <더 웨일>의 브랜든 프레이저와 함께 거론돼 마땅하다. 이 네 작품 속 주연배우는 자기 삶과 그 가운데 깃든 애환의 정서가 캐릭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특별한 감상을 자아내는 연기를 펼쳤다. 네 작품 모두 대단한 명작으로 거론됐고 배우들은 모두 강력한 오스카의 주인공으로 꼽혔다. 이중 브랜든 프레이저만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마이클 키튼과 미키 루크의 수상 실패는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밀크>의 숀 펜에게 오스카를 넘겨준 미키 루크 사례는 두고두고 잘못된 수상이란 꼬리표가 따라붙게 됐다.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는 어느 모로 보나 위에 언급한 세 배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연기를 선보였다. 캐릭터의 특별함과 그가 겪은 상황을 고려할 때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운 연기는 아니었을 테다. 특별한 연기를 해낸 데미 무어가 훌륭했으나 특별하다 하기엔 모자란 구석이 없지 않은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에게 오스카를 내준 건 2009년 숀 펜과 미키 루크의 격돌이 반복된 것과 유사한 장면 아닌가.
여러 논란과 해석이 이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재미있는 건 시상 결과에 뒤따르는 논란과 비평, 옹호와 비난이 모두 아카데미 시상식과 영화예술의 자산이란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와 관계된 모든 부문, 영화예술 전체가 더욱 활기를 띠어간다. 이 모습을 태평양을 사이에 둔 작은 나라의 영화평론가로 바라보며 산업 규모에 비해 훌륭한 역량을 가진 이 나라에 어째서 아카데미처럼 권위 있고 화제성 있는 시상식이 자리 잡지 못했는지 안타깝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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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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