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학년 2학기 > 스틸
< 3학년 2학기 > 스틸㈜인디스토리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오는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봄의 기운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곳은 역시 대학 캠퍼스일 테다. 취업 절벽이다 뭐다 해서 대학 시절이 부모 세대들의 낭만과는 거리가 까마득히 멀어진 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고단한 사회생활에 지친 이들에겐 여전히 한번은 다시 돌아가고픈 학창 시절 꿈 같은 추억으로 떠오를 순간이다.

19살, 11월이면 수능시험을 20살 3월이면 입학식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작 그 나이 또래에서 3할은 해당 추억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속칭 '실업계', 대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곧바로 뛰어드는 비율이 상당한데도 세상은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치부한다. 이들을 두고 공부를 못해서 혹은 하기 싫어서라는 낙인을 찍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세대가 처한 현실을 전파하는 창구 기능도 소화하는 청년세대의 독립영화에서조차 그들의 존재는 지워진다. 대학입시나 취업 절벽, 영화학과 졸업을 앞둔 진로 고민은 숱하게 볼 수 있지만, 전태일 열사의 유언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대학생과 실업계 출신은 동년배라도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무사히 어른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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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한 특성화 고등학교에 다니는 '창우'는 3학년 2학기를 맞이했다. 남들이 대학입시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이지만 창우는 대학 대신에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졸업하기 전에 어디든 직장에 채용되어야만 한다. 재수 삼수라는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인문계열에 비해 훨씬 절박한 상황인데, 가정 형편도 문제이지만 병역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창우 역시 대기업에 취업하고 싶지만, 성적이 특출하거나 특별한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기에 원하는 직장 골라잡을 처지가 아니다. 대기업에서 중견기업, 이제 중소기업으로 점점 눈높이가 낮아지는 상황이다. 가정 형편도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고, 혼자 3형제를 책임지는 엄마가 고생하는 것 빤히 봐오며 성장했다. 막내는 아직 어리고 한 살 터울 동생은 남들 다 다니는 학원도 마음껏 못 가며 대학 진학이 목표다. 따질 게재가 못 된다.

점점 선택의 여지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창우는 단짝 '우재'와 함께 남동공단의 한 중소기업에 현장실습 생활을 시작한다. 공단 일대 중소기업의 딱 평균치 처우와 환경이라지만, 실습을 마치고 정식 채용만 된다면 병역 특례와 전문대학 진학까지 기회가 올 수도 있단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며 담임 교사도 한번 도전해 보라 권했고, 취업 장려금도 어려운 형편에 만져본 적 없는 목돈이다. 그렇게 학교 대신 공장으로 출근하는 '3학년 2학기'가 시작한다.

공장에서 창우는 같은 나이로 1년 일찍 도제 과정으로 실습 중인 '성민'과 '다혜'를 만난다. 또래인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뺀질뺀질한 우재와 달리 창우는 느리긴 해도 묵묵하게 시킨 일을 해내며 차츰 적응해 나간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현실을 반영하듯 '실습'이란 명목과 달리 체계적인 교육이나 배려는 변변하지 않다. 눈치껏 따라서 하는 수밖에 없다. 주먹구구식 현장실습이 무색하게 정말 위험한 일은 대부분 외주에 맡긴다고 하지만 곳곳에는 조금만 실수하면 크게 다칠 위험 요소가 허다하다. 처음이라 서툴다 보니 핀잔도 틈만 나면 듣지만, 그래도 자기 힘으로 일해서 첫 월급을 받으니 보람과 기쁨도 따른다.

그렇게 한두 달 사이에 창우는 한 사람의 성인이자 제조업 노동자로 변모해 간다. 집안에 직장인이 한 명 더 추가되니 가정 형편도 좀 나아질 것 같다. 그렇게 좋은 일만 계속될 것 같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안전사고도 발생하고 오매불망 염원하던 정식 채용도 경쟁을 헤쳐나가야만 할 상황이다. 과연 그는 탈 없이 실습을 마치고 원하던 취업을 이루게 될까?

우리의 이웃, 혹은 나 자신에게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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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학년 2학기 >는 제목 그대로 실업계고 3학년 2학기를 맞이한 실습생 4명의 2개월을 통해 냉혹한 세계에 발을 들이는 첫 순간을 담는다. 전작 <휴가>에서 오랜 복직 투쟁에 지쳐가는 중년 노동자의 며칠간 '휴가'를 그렸던 감독은 어쩌면 그의 자녀들, 혹은 그의 젊은 시절을 되돌리는 것처럼 한국 사회 시스템에 편입되는 도상의 청소년 제조업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과도한 상투성과 신파적 요소, 예를 들어 산재 사고나 임금 체불 같은 극단적 설정에 그들을 내모는 대신에 지극히 일상적인, 하지만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사례들을 4명의 실습생 각각 행보를 통해 담는다.

영화는 피상적으로 실업계 현장실습을 인지하는 이들의 고정관념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간다. 그래서 처음엔 마치 일상 스케치처럼 여겨질 정도로 심심하다. 하지만 극영화임에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사실적인 전개가 자연스럽게 현실 속 실습생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일화로 전반부를 채운다. 그래서 진행은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탄탄하고, 이따금 일어나는 작은 사고와 불길한 징후가 의미심장하게 서사를 끌어간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해당 소재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실습생 문제를 소재로 다뤄 일정한 반향을 일으킨 <다음 소희>를 떠올릴 테다. 노동 문제를 큰 범주에서 다루는 동질감이 뚜렷하지만, 실제 일어난 사회적 비극을 기본 설정으로 극화한 <다음 소희>와 비교하면 < 3학년 2학기 >는 개별 사용자의 악마화나 노사분쟁의 격랑을 활용하는 간단한 방법을 구사하는 대신 보편적 구조의 문제점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한다.

극단적 불행은 손쉽게 우리에게 사안의 심각성을 고발하지만, 휘발하고 나면 '특별한' 소수의 경험으로 잊히기 일쑤다. 이 영화는 그런 예상 가능한 편향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최대한 절제하고 또 절제한다. 그렇게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청소년들에게 일어날 가능성으로 환기하려 한다. 제작진은 거기에 더해 작품 속 주요배역을 맡은 연기자들이 가능한 현실의 남동공단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이들처럼 보이길 원했던 것 같다. '창우' 역의 유이하 배우를 비롯해 실제로 특성화고 출신을 기용하거나 배우들이 함께 공장에서 실습 과정을 체험하는 등 사실성을 구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실제로 본 작품이 취한 방식은 사회적 사실주의를 선 굵게 표현한 작가주의 거장들에게서 전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켄 로치는 대처리즘의 파괴적 효과 탓으로 희망을 잃고 좌절한 노동계급 출신 청년을, 다르덴 형제는 급진적 노동 개혁과 이민자 증대로 흔들리는 지역 사회와 저임금 노동자 출신의 배우와 배경을 적절히 활용해 화면과 관객의 거리감을 허무는 데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이들의 현장성 가득한 촬영기법이나 화면 연출은 추종하되, 정작 그런 노력을 통해 포착하고자 한 진실에는 닿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 3학년 2학기 >는 정공법으로 그런 성취에 도전하는 드문 시도다.

'전국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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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영화는 실제로 화면 속 이야기와 연결된 경험을 가졌거나 겪게 될 이들과 만날 희망을 품고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 2024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해당 영화제 최다 수상을 기록하며 작품성과 시의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기에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개봉 일정 나오기만 기다릴 법하다. 소식통에 의하면 < 3학년 2학기 >는 2025년 9월경 개봉 예정이라 한다. 아직 시간이 제법 남은 편이다.

하지만 거의 반년이나 개봉이 남았는데 곳곳에서 영화 상영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개봉 직전에 시사회를 하는 건 당연한 정례가 되었고, 초반 홍보 효과를 위해 전국 규모로 순회 시사를 여는 경우도 이젠 드물지 않은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가을 개봉작을 벌써 상영하는 건 통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단편적인 소식이 바람결에 실려 오기 시작했다. '전국 수학여행'이라는 구상 아래 지난 2월 26일, 영화의 실제 배경인 인천에서 출발한 개봉 전 상영회가 전국을 순회할 예정이다. 인천에서 몇 차례 더 상영을 진행함은 물론, 전국 권역별로 해당 작품을 봤으면 하는 단체와 시민들이 상영위원회를 기획해 전국 순회를 연쇄적으로 이어갈 계획이다.

지난해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 직후 관객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관객 상당수가 작품 속 배경과 연관된 경험을 지닌 이들이었다. 감독과의 대화 등 거듭되는 GV가 천편일률적이라 지루해지던 상황에서 뜻밖의 분위기가 반가웠다. 영화가 관객을 선택할 권리도 있는 법이란 당연한 사실을 참 오래간만에 맛본 셈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만나야 할 관객들과 마주치기를, 꼭 봐주길 기대하는 이들과 접속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깃든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히는 대사, '사람이 일하다 죽을 수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지금 바로 주변의 이웃 중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어쩌면 나에게 당장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망치로 내리치듯 환기하는 순간이다. 그때마다 미디어는 너무 쉽게 복사해 붙인 듯 상투적인 신파로 형식적 애도와 개탄을 일삼지만, 정작 꼭 필요한 조치와 대책은 금방 휘발되어 실종하고 만다. 그렇게 냉소와 분노가 쌍으로 세상 곳곳에 고이는 참이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 편의 잘 만든 영화는 의외로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관객은 적어도 이 작품을 보고 극장을 나선 뒤에도 제법 오랫동안 영화 속 현실의 단면을 각자 일상 속에서 품게 될 테다. 어쩔 수 없단 식으로 흘려보내는 불편한 진실은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로 변환해야 한다. 개봉 일만 기다릴 게 아니라 '영화의 친구'가 되려는 이들은 눈과 귀 쫑긋 영화 속 19살들과 만남을 준비하자.

 < 3학년 2학기 > 전국 수학여행 인천 상영회 포스터
< 3학년 2학기 > 전국 수학여행 인천 상영회 포스터㈜인디스토리

<작품정보>

3학년 2학기
The Final Semester
2024|한국|드라마|105분
2025.09 개봉(예정)
감독 이란희
출연 유이하, 양지운, 김성국, 김소완, 강진아
배급 ㈜인디스토리



3학년2학기 이란희감독 유이하 다음소희 현장실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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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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