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지의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의 <휴먼다큐 자식이 좋다> 1편 갈무리
핫이슈지
코미디언 이수지가 '대치맘'(대치동맘)을 패러디한 '제이미맘 이소담씨의 별난 하루'라는 영상이 연일 화제다. '몽클레어'라 불리는 몽클레르 패딩과 샤넬 백, 에르메스 목걸이 등의 착장, 영어를 섞은 우아하고 고상한 말투, 자녀에게는 관대하지만 과외 강사에게는 무례하고 인색한 태도가 '거울치료'라는 평으로 이어졌다. 이 영상이 화제를 얻으면서 당근마켓에 중고 몽클레르 패딩 매물이 많아졌다는 뉴스는 덤. 이 글을 쓰던 중 제이미맘 콘텐츠의 2탄이 공개됐고, 밍크 조끼와 고야드 가방이 '화형대'에 올랐다.
이 유튜브 영상의 댓글은 제이미맘과 같은 '극성맘'을 나도 경험했다는 증언으로 이어졌다. 대치동 스타벅스에서 이런 엄마 많이 봤다, 송도 국제학교에 이런 엄마 많다, 공항에서 이런 엄마 봤다, 옆집에 이런 엄마 산다...
댓글만 보면 제이미맘은 서울 대치동에만 있지 않다. 반포 아파트와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에도, 경기도 신도시 공원과 카페에도, 옆집에도, 어디에나 제이미맘이 있다. 어떤 브랜드가 유행한다고 하면 우르르 따라 사는 여자, '영재적 모먼트'에 호들갑 떠느라 자식에 대한 객관화가 안되는 여자, 할 일 없으니 자녀 교육에만 매달리며 브런치 카페에서 소모적인 대화를 나누는 여자. 댓글들에 따르면 이런 여자가 제이미맘이다.
어디에도 없는 제이미맘
사실 제이미맘은 어디에나 있을 수가 없다. 몽클레르의 인기 제품인 여성용 보에딕 후드 시어링 롱 다운 재킷은 공식 홈페이지 가격 455만 원(3월 4일 기준), 샤넬 가브리엘 호보백 스몰 사이즈는 600만 원을 훌쩍 넘고, 포르쉐 카이엔은 1억3천만 원 대다. 그가 타거나 두른 것들의 가격은 그가 대치나 대치 인근에 자가로 살고 있다면 귀여운 수준이다. 즉, 제이미맘은 평범치 않은 재력의 소유자다.
이 재력이 오롯이 남편에게서 나왔을까? 상향혼보다 동질혼이 보편화되는 시대, 국밥집 딸래미라는 과거를 숨기고 의사와 결혼한 JTBC 드라마 < SKY캐슬 >의 예서엄마보다, 좋은 대학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비슷한 전문직 남성과 결혼하는 사례를 찾는 것이 훨씬 쉽다. '강남 엄마 교복'을 입고 아이를 대치동에 라이딩하는 제이미맘 역시 남부럽지 않은 대학을 나와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다녔을(혹은 다닐)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생인 나의 경험에 비춰보면, 내 어머니 세대 대부분의 최종 학력은 고졸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턱없이 낮았으니까. 경제성장기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며 교육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깨달은 엄마들은 자녀 교육을 인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들의 딜레마는 그들이 목표로 삼은 자녀의 명문대 입학을 자신은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내 어머니 세대가 사춘기 자녀들에게 자주 들어야 했던 말은 이런 거다. "엄마가 뭘 알아?" 2018년 방영된 드라마 < SKY캐슬 >에서 3대째 의사 가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할머니에게 예빈이가 했던 말도 이랬다.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할머니가 가시지 그랬어요!" 예빈이의 시선 속에서 엄마와 할머니는 본인은 치열하게 공부해본 적 없으면서 자식에게는 공부를 강요하며, 남편의 성취로 먹고 살면서 자식의 성취로 대리만족을 누리려는 '무임승차자'다. 이 시선은 교육열이 높은 엄마를 바라보는 흔한 혐오의 시선과 유사하다.
오늘날 '극성맘'은 과거와 다르다. 본인이 성취하지 못했기에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달려봤고 성공도 해봤기에 자식을 종용한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전략과 방법을 알고 있고 학원의 '불안 마케팅'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스스로 고민해 입시 로드맵을 짤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나 정도는 해야'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안다.
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말투를 구사하며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무비판적 인간이 아니라, 지식과 이론으로 중무장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전략가들이다. 이들의 전략에는 이제 '정서'도 빠지지 않는다. 공부 때문에 아이의 정서가 불안하지 않도록 주말이면 캠핑이나 여행을 다니고, 플레이데이트와 파자마파티 등을 기획한다.
이들은 가진 것과 이룬 것이 많은 데다 자신을 위해서든 자녀를 위해서든 지나치게 열심히 사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학벌과 좋은 직장까지 쟁취했기 때문에 이들의 실천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상류층이고 이들처럼 살 수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일단 내 주위에 몽클레르 패딩을 입은 이는 눈 크게 뜨고 찾아봐도 없다.)
어디에나 있는 제이미맘
▲이수지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의 <휴먼다큐 자식이 좋다> 2편 갈무리핫이슈지
이렇게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제이미맘은, 그러나 어디에나 있다. 제이미맘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한편으로, 제이미맘의 사교육 실천은 대치동 바깥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으며 그 실천의 논리는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남들도 다 하니까, 내 아이만 안하면 손해니까, 한국은 안정적인 직장이 없으면 도태되는 사회이고 두 번째 기회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아이를 잘 키워야지 다짐하더라도 그 다짐 역시 기존의 선택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 방영된 KBS <추적 60분> '7세 고시 -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 편에는 7세 고시(초등영어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치르는 테스트를 일컫는 말)로 힘들어한 경험이 있는 아이의 사례가 등장한다.
이 아이의 엄마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이 딴 영상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우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엄마가 아이를 반갑게 맞아준 후 간식을 챙겨준다. 햇살이 잘 드는 거실에서 아이는 엄마와 함께 영어책을 읽으며 영어학습을 한다. 이 평화로운 광경은 너무 전형적이라 의문을 낳는다. 학원은 해롭지만 엄마표 영어는 괜찮다는 건가?
엄마표 영어의 주창자들은 엄마표 영어가 과도한 영어 사교육의 대안이라고 말하지만 정말일까? 자녀의 단계에 맞춰 영어 원서와 DVD를 준비하고 '집중 듣기'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정소를 정하고 '흘려 듣기'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영어 음원을 틀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루틴을 만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엄마와 아이의 기질이 맞기란 쉽지 않다. 거리두기가 힘든 관계의 특성상 엄마표 영어의 여정은 수많은 협상과 잔소리, 버럭과 불면의 밤으로 점철될 수도 있다.
입시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다른 샛길을 찾는 게 아니라, 아예 입시교육으로부터 대피하자고 다짐하는 이들도 있다. 대안 교육, 자연주의 육아 등의 키워드가 이에 포함된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소수자이기에 대세와 싸우며 자녀를 잘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그 짐이 너무나 무거운 나머지, 다짐은 '내가 아이를 키운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겠어'로 흐르기 쉽다. '사교육을 발라서'(?) 키운 아이들보다 내 아이가 더 잘 자랐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그들'과 우리를 구별짓기 하는 것이다. 주류 아이들과 비교해 우리 아이가 잘하는 것들(건강, 정서적 안정감, 자기주도적 능력 등)의 서사를 만들고 유통하는 일에 전념한다.
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부모보다는 또래집단의 영향력이 커지며, 또래의 주위 아이들이 잘 자라야 내 아이도 잘 자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과도한 사교육에서 벗어나 내 아이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엄마표 영어를 실천하는 이들도,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이들도 '대치맘'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그 자장 안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제이미맘의 영상 댓글들에서 반복되는 현실, 엄마라는 이유로 손쉽게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맘'이라는 단어가 모멸적으로 사용되는 현실과 별개로, '대치맘'에 대한 풍자를 단순히 여성 혐오로 몰아갈 수만은 없다.
여성의 독박육아, 입시경쟁, 사교육 과열,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등이 아무리 차곡차곡 쌓여있더라도, 이들의 사교육 실천이 이러한 현실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면? 이들을 입시경쟁의 피해자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도 없으면서도 어디에나 있고, 조롱과 혐오에 쉽게 노출되는 집단이면서도 피해자라고만 할 수 없는 제이미맘은 도대체 누구인가.
제이미맘은 나이며 당신이다. "대치동 아이들은 더 많이 한다는데"며 불안해하는 당신, "대치동에 비하면 많이 시키는 것도 아니니까"라며 학원 뺑뺑이를 합리화하는 당신, '대치맘'과 다르게 아이를 키워야 한다며 그들의 실천을 끝없이 의식하는 당신, 아이교육에 유난 떨지 말라고 훈수 두다가도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아내를 탓하는 당신, 이 모든 일을 팔짱끼고 소비하는 당신.
그러니 당신은 제이미맘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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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상한 세계>(오월의봄, 2024)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