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롤모델' 박주아의 사인을 받으며 행복해하고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롤모델' 박주아의 사인을 받으며 행복해하고 있다.황혜정

"엄마, 여기 '여자야구' 선수도 있잖아요."

2013년생 '초등학교 6학년' 최지유(12)양은 약 1년 6개월 전 야구를 시작했다. 2022시즌 프로야구 SSG랜더스가 우승을 차지했을 때, 하필 우승을 확정 지은 날 어머니와 함께 첫 야구 '직관'을 갔다가 야구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SSG가 우승하는 순간, 엄마가 저를 꽉 끌어 안아 주셨다. 그때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었다"라며 "현장의 응원 소리와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야구팬이 됐다"라고 했다.

어머니 조상미씨는 "딸이 숫기가 없다"고 했지만, 최양은 단순히 야구 '보는' 것을 넘어 '하는' 것을 택했다. 딸이 야구를 직접 해보고 싶다고 하자, 조씨는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 "그동안 여자야구 선수를 본 적이 없는 걸요."

부모님의 만류에도 최양은 뜻을 굽히기 보단, '인터넷 활용'에 능숙한 2013년생답게 검색을 해보며 여학생인 자신이 야구를 할 방법을 찾았다. '여자야구'를 검색하자 눈에 띈 건 바로 여자야구 기사와 유튜브 영상 속 여자야구 선수들의 모습. 최지유양은 이들의 모습을 들이밀었다. 부모님을 설득시킨 순간이었다.

최양이 미디어를 통해 찾아낸 여자야구 선수는 바로 한국 여자야구 국가대표이자 에이스이기도 한 박주아(21)다. 당시 박주아는 JTBC 인기 예능 <최강야구>에서 여성 최초로 트라이아웃에 도전하며 전파를 탔고, 자신의 훈련 모습을 직접 찍고 편집해서 올리는 개인 유튜브 채널('아주주아')도 운영하고 있어 최양의 눈에 바로 띠었던 모양이다. 미디어에 '여자야구' 선수나, 관련 영상의 노출이 많아야 하는 이유인 셈이다.

그렇게 2023년 6월, 최양은 엄마 손을 잡고 집 근처 야구단을 찾았고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에 들어가 남학생 사이에 껴서 야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굳은 결심으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동성 친구 한 명 없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야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양은 "남자애들 사이에서 야구를 하다 보니 야구단에 마음 터놓을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고 했다. 그때마다 야구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준 '롤모델' 박주아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롤모델들'과 원없이 야구한 날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대표팀 필딩 훈련에 참가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대표팀 필딩 훈련에 참가했다.황혜정

"주아 언니랑 같이 야구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고 한 최지유양은 그러부터 1년이 조금 지난 뒤 꿈에 그리던 롤모델을 만난다. 바로 지난 1일 강원도 양구에서 열린 '2025년 양구 여자야구 친선대회'를 찾으면서다.

사회인 여자야구팀을 맡기도 했던 대한클럽야구협회 신상민 회장이 최양을 보고 이날 양구에 와서 한국 여자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한 것이 계기였다.

들뜬 표정으로 대표팀 훈련지를 찾은 최지유는 대표팀 허일상 감독의 흔쾌한 허락을 받아 인생 처음으로 언니들과 함께 야구를 했다. 대표팀 전담 여성 트레이너의 힘찬 구호를 들으며 최양은 언니들의 동작을 열심히 따라했다. 박주아와 같은 조에서 훈련을 받은 그는 눈으로 동경하는 언니를 쫓으며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다.

최지유양은 평소에 훈련하던 '리틀야구' 규격이 아닌 '성인' 규격에서 실책 없이 안정적으로 타구를 받아내고 송구했다. 2루에서 펑고를 받아서 1루로 송구하는 것은 물론, 유격수-2루수-1루수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 훈련도 무리 없이 소화했다.

표정도 한없이 밝았다. 이를 지켜보던 대표팀 언니들은 탄성을 내뱉으며 "한국 여자야구 미래가 밝다, 기본기가 좋다"라며 폭풍 칭찬을 했다. 허 감독도 최양의 훈련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저 친구, 진짜 잘하는데"라며 웃었다.

"언니들과 같이 야구를 한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그냥 모든 게 다 좋았어요."

사춘기를 앞둬 감수성이 풍부해진 소녀는 이날 하루가 너무나 소중했다. 홀로 외롭게 야구를 해온 줄 알았는데, 자신과 같은 길을 걷다가 성장해 함께 모여 대표팀 훈련을 받는 수많은 롤모델을 직접 보고 함께 손발을 맞춰봤기 때문이다. 오늘 훈련은 어땠냐는 질문에 최지유양이 "그냥 모든 게 너무 다 좋았다"고 말한 이유다.

야구를 시작한 해이자, 자신의 생년월일에서 '일'인 23을 등번호로 택한 최지유양은 이날의 벅차고 행복한 추억을 발판 삼아 또 하나의 중대 과제를 해결할 예정이다. 바로 부모님 설득이다.

"엄마아빠가 저보고 중학교 1학년까지만 야구하래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최지유양은 이내 "주아 언니 사인볼을 제 방에 고이 모셔 놓고 그걸 보면서 야구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꼭 보여드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4년 뒤, 최양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국제대회를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키 165㎝로 우월한 신체조건을 자랑하는 그의 성장기를 지켜봄 직 하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롤모델' 박주아와 함께 대표팀 트레이닝 훈련을 받고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롤모델' 박주아와 함께 대표팀 트레이닝 훈련을 받고 있다.황혜정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롤모델' 박주아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리틀야구단 소속 유일한 여학생 최지유양이 '롤모델' 박주아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황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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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여자야구 리틀야구 박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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