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 스틸
<콘클라베> 스틸(주)엔케이컨텐츠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콘클라베'. 전 세계 가톨릭교회와 신도를 통솔하는 교황 유고 시에 신임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전반을 통칭하는 말이다. 현재 선거권자는 (80세 이하) 추기경으로 규정되어 있다. 라틴어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의 모임과 교황 선거 그 자체를 뜻한다. 어원은 라틴어 'conclave',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어원 그대로 신임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추기경단은 외부와 격리되어 사실상 감금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놓인다. 3일간 거듭 투표를 진행해 2/3 이상 지지를 얻은 이가 교황으로 선출된다. 투표한 용지는 구설수를 방지하기 위해 결과 확인 후 소각된다. 이때 투표가 진행되는 시스티나 성당 굴뚝으로 검은 연기가 올라오면 아직 선출하지 못했다는 징표로, 선거가 완료되면 흰 연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표식이 이뤄진다.

왜 이렇게 복잡하고 가혹한 선거 과정이 정립되었을까? 당연히 세간의 흥미가 모일 수밖에 없는 절차다. 이는 교황이란 자리가 단순히 로마 가톨릭교회의 종교 지도자로만 존재할 수 없는 운명에 시작부터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에서 박해받던 시절에야 목숨만 위험할 뿐 아무 혜택이 없는 자리였지만, 훗날 신앙이 허가되는 것을 넘어 제국의 국교가 되자 곧 거대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황제가 교황을 겸한 동로마제국과 오랜 분쟁,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신성로마제국과 서유럽 패권 다툼, 강성해진 프랑스 국왕에 의한 '아비뇽 유수' 등의 역사적 사건은 교과서에도 자세하게 수록될 정도다.

그렇게 정치적 다툼의 총아가 된 교황 직위는 급기야 3명의 대립 교황이 탄생하는 지경에 이르고, 교통정리가 안 되는 바람에 3년 가깝게 선거가 연장되기에 이른다. 참지 못한 시민들이 추기경들이 선거 과정을 치르던 건물 문을 봉쇄하고 지붕을 뜯어내 비바람이 몰아치게 방치한다. 심지어 식량 반입을 줄여 하루라도 빨리 선거를 마치라고 압박한 데에서 '콘클라베'의 기본 틀이 13세기 말에 완성된다. 그로부터 8세기가 지났다.

밀실 선거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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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어느 날, 교황이 심장마비로 급작스레 선종한다. 교황의 유고가 공표되고 장례절차를 치른 직후 전 세계에 산재한 107명의 선거권이 유효한 추기경단이 로마로 집결한다. 여기에 뜻밖의 1명이 추가되어 선거권자는 108명으로 확정된다. 모두가 쟁쟁한 실력자에 각자의 교구에서 권위와 대표성을 확보한 이들이다. 이들은 정해진 전례에 따라 '콘클라베'에 돌입한다. 일단 선거 과정이 시작되면 투표는 오직 시스티나 성당 내에서만, 숙박은 선거 과정에서 유일한 숙소로 공인된 마르타의 집 게스트하우스로 한정한다. 모든 외부 연락수단이 수거되는 건 물론, 도청 방지를 위한 삼엄한 조치가 행해진다.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절차가 진행된다. 로렌스 추기경은 추기경단 단장으로 이 막중한 선거 관리업무를 떠맡는다. 전 세계 10억의 신도를 대표하는 교황직은 과로사할 정도로 혹독하지만, 교회의 방향타를 정하는 거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종신직이기도 하다. 야망을 품은 추기경이라면 한 번은 도전해 보고픈 꿈이기도 하다. 1962년 2차 가톨릭 공의회 당시 정해진 자유·개혁주의 지침으로부터 60년이 흐른 상황에서 전통주의를 고수하려는 교회 내 흐름의 반발이 심상찮은 데다, 발단이 '로마의 주교'인 교황 자리가 30년 넘게 이탈리아 외부를 전전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팽배한 상태다.

시스티나 성당과 마르타의 집을 오가며 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각 계파의 후보들은 신경전과 물밑 세 규합을 시작한 상태다. 유력 후보는 4명이 꼽힌다. 프랑스계로 범 개혁파에 속한 트랑블레 추기경, 개혁파의 구심이자 이탈리아계 벨리니 추기경, 같은 이탈리아계이지만 강경 보수파의 수장 테데스코 추기경, 보수파이지만 아프리카계 흑인이란 상징성을 가진 아데예미 추기경이다. 이들의 성향과 지지세력은 이미 확연히 갈린 상태다. 선거 관리를 책임진 토마스 추기경은 물론 공정하게 처신해야 하지만, 개혁적이던 전임 교황과 사사건건 충돌하던 테데스코 추기경이 선출되는 건 피하고 싶다.

개혁파는 벨리니 추기경을 지지하는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벨리니는 1차 투표부터 고전을 면치 못한다. 테데스코 추기경은 보수파의 일관된 지지를 업고 있는데, 개혁파는 표가 여러 군데로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판세가 여러 차례 투표를 거듭해도 오리무중으로 치닫자 합종연횡이 격심하게 일어난다. 어느새 성스러워야 할 교황 선출 과정은 현실 정치판의 추악한 뒷거래와 음모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후보들의 치부와 감춰둔 비밀이 선거전 가운데 은밀하게 유출되고, 토마스 추기경은 하루하루 지옥에 빠진 듯하다. 그렇지만 교황의 공석은 있을 수 없다. 72시간이 화살처럼 흘러간다.

역사 '덕후'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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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대체 역사물의 걸작 <당신들의 조국>, <이니그마>, <아크엔젤> 등은 물론 '로마사' 3부작(<임페리움>·<루스트룸>·<딕타토르>) 등으로 국내에도 명성 높은 영국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로버트 해리스는 영화의 제작자이자 각색에도 참여해 원작의 수준 높은 고증을 재현하는데 한몫을 다 했다. 그 덕분에 <콘클라베>는 수천 년 역사로 축적된 가톨릭교회와 콘클라베 예식을 높은 차원으로 표현하는데 상당한 성취를 자랑할 수 있었다. 가톨릭 신도라 해도 체감하기 힘든 교황 선출 절차를 곁에서 지켜보듯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유서가 깊은 데다 일반인에겐 베일에 휩싸인 콘클라베 절차는 이미 여러 편의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이탈리아 거장 난니 모레티의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남들 보기엔 영광에 넘치는 지위이지만, 정작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에겐 종신형 재앙과 다를 바 없는 교황 자리에 강제로 앉기를 피해 도망치는 후보자까지 등장할 정도로 실감 나게 묘사한 바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근래 나온 동일 소재 작품 중 이 영화 정도의 고증과 밀도는 감히 없다 해도 무방해 보인다.

오래된 선거절차 고증의 빼어남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콘클라베>는 그저 정밀한 미니어처 재현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해당 선거 예식의 무게감이 마치 지구와 다른 외계 행성의 고압 중력처럼 등장인물들을 억누르는 형상화와 내부의 치열한 분파 투쟁을 통해 오늘날 가톨릭교회라는 전 지구적 조직이 직면한 난제와 의견 대립을 세련된 정치 스릴러처럼 풀어낸다. 아니 오늘날 최고 수준의 정치 극화라 해도 손색이 없는 압박감을 관객에게까지 미친다. 토마스 추기경이 선거 관리라는 중책을 수행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선대 교황의 개혁파 흐름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의외의 풍선효과를 일으키고, 마침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스펙터클' 그 자체다.

10억 신도의 신앙생활은 물론 국제 정세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신임 교황의 정치적 입장은 가톨릭교회의 방향을 좌우할 폭탄의 뇌관과도 같다. 같은 추기경단의 일원이지만 계파별로 반드시 저기는 위험하다, 여기는 글렀다는 판단은 명확하다. 거대한 집단에서 미래 전망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필연이지만, 이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구급 규모 조직에선 그런 갈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vs. 외부, 유럽 vs. 비유럽, 전통적 백인 vs. 유색인종 등 여러 겹의 그룹이 나눠진다. 식탁 역시 언어와 그룹별로 명백히 구분된다.

최고의 긴장은 자유주의 개혁파 대 보수주의 정통파의 갈등에서 촉발된다. 여기에 바티칸의 기득권층, 북반구 강대국을 대표하는 추기경단과 3세계 다원주의 세력이 구분된다. 솔로몬의 재판처럼 한칼에 나눌 수도 없다. 흑인이지만 이혼이나 동성애에 반대하고, 엘리트 백인이지만 타 종교와 화해 및 연대를 강조하는 선봉에 선다. 무엇보다 그저 사욕이 아니라 교회의 방향을 둘러싼 철학적·신학적 입장 차가 뿌리에 있기에 타협을 통한 봉합도 힘들다. 노회한 정치술이 그 때문에 일정하게 통용된다. 무한 갈등은 피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일부는 '차악'을 택하는 게 교황 선출에서 올바른 것인가 반문하기도 한다.

신의 체스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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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스틸(주)엔케이컨텐츠

"의심 없는 확신은 통합의 적이며, 다양성이 교회의 힘이다."

토마스 추기경은 콘클라베 개최를 선포하는 관리자로서 원고 없이 연설에 임한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신앙에 관한 신념으로 특정한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보수파에 대한 엄중한 경고 차원으로 용기를 낸 것이지만,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영향력이 발생한다. 추기경단 사이에서 원래 선거 관리업무로 한발 물러선 토마스가 갑자기 개혁파의 선명 후보로 대두한 것이다. 그로 인해 개혁파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된다. 연달아 음모가 터지면서 토마스 추기경은 외부 교신이 극히 제한된 내부에서 규정을 최대한 준수하며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은 더 큰 고뇌와 모순으로 토마스를 끌고 들어가기만 할 뿐이다.

고도로 폐쇄된 콘클라베를 구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촬영이 금지된 바티칸 대신 거대 세트장을 건설해 고증에 최선을 다했다. 그로 인해 주변 여건 구애받지 않고 상징적 시각효과를 통해 수천 년 가톨릭의 무게감을 관객이 오롯이 체감하게 한다. 여기에 토마스 추기경 역 랄프 파인즈를 비롯해 주요 후보자 역할을 담당한 중견 배우들이 불꽃 튀는 연기 합을 펼치는데, 웬만한 첩보물 능가하는 밀도다. 거기에 침묵을 준수하다 한 방 터트리는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연기력은 이제야 발견한 게 속상할 정도다.

그렇게 <콘클라베>는 교회를 희화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들의 세상이 당면한 숙제를 영화적 흥미로 연착륙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 속 갈등의 중심축은 가톨릭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종교, 그리고 국가들이 공통분모로 지닌 과제이기에 오락을 초월해 세계시민이라면 필수 상식으로 삼아 마땅하리라 단언할 수 있겠다.

 <콘클라베>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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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콘클라베
Conclave
2024|미국/영국|시크릿 스릴러
2025.03.05. 개봉|120분|12세 관람가
감독 에드워드 버거
출연 랄프 파인즈, 스탠리 투치, 존 리스고, 이사벨라 로셀리니
수입 (주)엔케이컨텐츠
배급 ㈜디스테이션

 <콘클라베> 포스터
<콘클라베> 포스터(주)엔케이컨텐츠


콘클라베 에드워드버거감독 랄프파인즈 이사벨라로셀리니 종교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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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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