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 스틸
(주)엔케이컨텐츠
영화는 대체 역사물의 걸작 <당신들의 조국>, <이니그마>, <아크엔젤> 등은 물론 '로마사' 3부작(<임페리움>·<루스트룸>·<딕타토르>) 등으로 국내에도 명성 높은 영국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로버트 해리스는 영화의 제작자이자 각색에도 참여해 원작의 수준 높은 고증을 재현하는데 한몫을 다 했다. 그 덕분에 <콘클라베>는 수천 년 역사로 축적된 가톨릭교회와 콘클라베 예식을 높은 차원으로 표현하는데 상당한 성취를 자랑할 수 있었다. 가톨릭 신도라 해도 체감하기 힘든 교황 선출 절차를 곁에서 지켜보듯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유서가 깊은 데다 일반인에겐 베일에 휩싸인 콘클라베 절차는 이미 여러 편의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이탈리아 거장 난니 모레티의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남들 보기엔 영광에 넘치는 지위이지만, 정작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에겐 종신형 재앙과 다를 바 없는 교황 자리에 강제로 앉기를 피해 도망치는 후보자까지 등장할 정도로 실감 나게 묘사한 바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근래 나온 동일 소재 작품 중 이 영화 정도의 고증과 밀도는 감히 없다 해도 무방해 보인다.
오래된 선거절차 고증의 빼어남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콘클라베>는 그저 정밀한 미니어처 재현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해당 선거 예식의 무게감이 마치 지구와 다른 외계 행성의 고압 중력처럼 등장인물들을 억누르는 형상화와 내부의 치열한 분파 투쟁을 통해 오늘날 가톨릭교회라는 전 지구적 조직이 직면한 난제와 의견 대립을 세련된 정치 스릴러처럼 풀어낸다. 아니 오늘날 최고 수준의 정치 극화라 해도 손색이 없는 압박감을 관객에게까지 미친다. 토마스 추기경이 선거 관리라는 중책을 수행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선대 교황의 개혁파 흐름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의외의 풍선효과를 일으키고, 마침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스펙터클' 그 자체다.
10억 신도의 신앙생활은 물론 국제 정세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신임 교황의 정치적 입장은 가톨릭교회의 방향을 좌우할 폭탄의 뇌관과도 같다. 같은 추기경단의 일원이지만 계파별로 반드시 저기는 위험하다, 여기는 글렀다는 판단은 명확하다. 거대한 집단에서 미래 전망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필연이지만, 이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구급 규모 조직에선 그런 갈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vs. 외부, 유럽 vs. 비유럽, 전통적 백인 vs. 유색인종 등 여러 겹의 그룹이 나눠진다. 식탁 역시 언어와 그룹별로 명백히 구분된다.
최고의 긴장은 자유주의 개혁파 대 보수주의 정통파의 갈등에서 촉발된다. 여기에 바티칸의 기득권층, 북반구 강대국을 대표하는 추기경단과 3세계 다원주의 세력이 구분된다. 솔로몬의 재판처럼 한칼에 나눌 수도 없다. 흑인이지만 이혼이나 동성애에 반대하고, 엘리트 백인이지만 타 종교와 화해 및 연대를 강조하는 선봉에 선다. 무엇보다 그저 사욕이 아니라 교회의 방향을 둘러싼 철학적·신학적 입장 차가 뿌리에 있기에 타협을 통한 봉합도 힘들다. 노회한 정치술이 그 때문에 일정하게 통용된다. 무한 갈등은 피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일부는 '차악'을 택하는 게 교황 선출에서 올바른 것인가 반문하기도 한다.
신의 체스판처럼
▲<콘클라베>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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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없는 확신은 통합의 적이며, 다양성이 교회의 힘이다."
토마스 추기경은 콘클라베 개최를 선포하는 관리자로서 원고 없이 연설에 임한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신앙에 관한 신념으로 특정한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보수파에 대한 엄중한 경고 차원으로 용기를 낸 것이지만,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영향력이 발생한다. 추기경단 사이에서 원래 선거 관리업무로 한발 물러선 토마스가 갑자기 개혁파의 선명 후보로 대두한 것이다. 그로 인해 개혁파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된다. 연달아 음모가 터지면서 토마스 추기경은 외부 교신이 극히 제한된 내부에서 규정을 최대한 준수하며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은 더 큰 고뇌와 모순으로 토마스를 끌고 들어가기만 할 뿐이다.
고도로 폐쇄된 콘클라베를 구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촬영이 금지된 바티칸 대신 거대 세트장을 건설해 고증에 최선을 다했다. 그로 인해 주변 여건 구애받지 않고 상징적 시각효과를 통해 수천 년 가톨릭의 무게감을 관객이 오롯이 체감하게 한다. 여기에 토마스 추기경 역 랄프 파인즈를 비롯해 주요 후보자 역할을 담당한 중견 배우들이 불꽃 튀는 연기 합을 펼치는데, 웬만한 첩보물 능가하는 밀도다. 거기에 침묵을 준수하다 한 방 터트리는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연기력은 이제야 발견한 게 속상할 정도다.
그렇게 <콘클라베>는 교회를 희화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들의 세상이 당면한 숙제를 영화적 흥미로 연착륙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 속 갈등의 중심축은 가톨릭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종교, 그리고 국가들이 공통분모로 지닌 과제이기에 오락을 초월해 세계시민이라면 필수 상식으로 삼아 마땅하리라 단언할 수 있겠다.
▲<콘클라베>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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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콘클라베
Conclave
2024|미국/영국|시크릿 스릴러
2025.03.05. 개봉|120분|12세 관람가
감독 에드워드 버거
출연 랄프 파인즈, 스탠리 투치, 존 리스고, 이사벨라 로셀리니
수입 (주)엔케이컨텐츠
배급 ㈜디스테이션
▲<콘클라베> 포스터(주)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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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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