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은이 고교야구 클럽팀인 '화성동탄BC'에서 뛰던 시절.
손가은이 고교야구 클럽팀인 '화성동탄BC'에서 뛰던 시절.손가은 제공

"어제 봉황대기 뛴 거 맞죠?"

떨리는 마음으로 선수의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

약 10분이 지날 때였을까. "맞습니다!"라는 답이 왔다. 24년 만에 고교야구 전국 대회에 출전한 두 번째 여자 선수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바야흐로 2023년 8월 19일, 만 17세 소녀는 신월구장에서 열린 '제 51회 봉황대기' 1회전 '은평구BC'와의 경기에 8번타자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2회 얻게 된 첫 번째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나고 교체돼 경기를 마쳤지만, 여자 선수로선 24년 만이자 1999년 안향미(당시 덕수정보고) 이후 고등학교 공식 대회에 출전한 두 번째 선수가 됐다. 올해 한 대학의 건강재활학과 신입생이 된 손가은(20)의 이야기다.

남자 속 유일한 여자인데, 왜 아무도 보도를 안 하지?

당시 손가은의 경기 출전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여자 선수가 엘리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게 '특이'할 법도 한데, 이상하리 만치 조용했다. 필자도 손가은의 출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미리 알았다면 출전 순간부터 스케치를 해 '속보'로 냈을 것이다.

우연히 그의 인스타그램(SNS)를 보다가 손가은이 고교야구 4대 메이저 전국 대회 중 하나인 '봉황대기'에 출전한 사실을 뒤늦게 보게 됐다. 별 생각 없이 넘겼다가, 갑자기 '어?!'하고 무언가가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최초 아닌가?'라는 의문이 계속 들어 미친듯이 검색했고, 검색해본 결과 '봉황대기' 최초의 여성 선수 출전이자, 전국 모든 고교야구 대회를 포함하면 24년 만의 역대 두 번째 여성 선수 출전이었다.

 손가은이 고교야구 클럽팀인 '화성동탄BC'에서 뛰던 시절.
손가은이 고교야구 클럽팀인 '화성동탄BC'에서 뛰던 시절.손가은 제공

새로운 역사 탄생을 직감했지만, 중요한 사실인 만큼 이중으로 확인하기 위해 고교야구 대회를 주관하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에 즉각 연락했다. "손가은 선수가 어제 봉황대기에 출전했던데, 1999년 안향미 선수 이후에 고교야구 대회에 뛴 또 다른 여자 선수는 없었나요? 없었다면, 손가은이 두 번째 여자 선수인지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빠른 확인을 부탁드렸다.

당시 협회 관계자는 "24년치 선수 명단을 모두 검토해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손가은이 출전한 다음날인 20일에도 해당 보도가 나가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고, 협회 관계자로부터 8월 21일 오전 8시 30분쯤 문자 한통이 왔다. "손가은이 협회 주최 전국고교야구대회 출전한 두 번째 여자 선수가 맞습니다." 이미 답을 확신하고 기사를 모두 써놓은 터라 그로부터 30분 뒤인 21일 오전 9시에 기사를 송출할 수 있었다.(관련기사 : [단독] 안향미 이후 24년 만에…고교야구 공식 대회 출전한 두 번째 여자 선수 탄생 https://www.sportsseoul.com/news/read/1341038)

기사가 나가기 직전, 선수에게 먼저 알렸다. "또 하나의 역사를 썼네요. 축하해요!" 손가은은 "진짜요?"라며 놀라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말 몰랐어요. 누군가 저 이전에 고교야구 대회에 뛰었겠지라는 생각이었지, 제가 두 번째이자 24년 만인지는 몰랐네요. 그걸 알았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옛말 된 '금녀의 땅'"... 계속 이어져야 할 위대한 기록

 2024년 8월 17일자 <한국일보> 스포츠면 톱기사에 손가은의 이야기가 올라갔다.
2024년 8월 17일자 <한국일보> 스포츠면 톱기사에 손가은의 이야기가 올라갔다.한국일보

보도의 파장은 제법 컸다. 손가은의 경기 모습을 보러 오는 팬들이 있었고, 이들은 손가은에게 빵을 건네며 "덕분에 여자야구 선수가 있는 것을 알았다. 정말 멋있고, 응원하고 있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다른 매체에서도 손가은 인터뷰 기사를 많이 냈다. 필자가 존경하는 선배 동아일보 임보미 기자가 <옛말된 '금녀(禁女)의 땅'… 78년史 첫 여고생, 1루를 지켰다>라는 기사로 한국일보가 주최한 '봉황대기'에 이어 이듬해 5월 열린 동아일보가 주최한 '황금사자기'에도 출전한 손가은을 조명하는 기사를 썼다.

일주일 뒤엔, 필자가 좋아하는 선배인 경향신문 이두리 기자는 <야구소녀 손가은 "목표는 선수로서 야구를 계속하는 것">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세상에 내놓았고, 그 다음달엔 주간지 <시사인>에서 이 주의 인물로 손가은을 선정하며 <방망이 휘두르며 길을 내는 여자 야구>라는 인물 기사를 썼다.

다시 1년이 지났다. 손가은은 2024년 8월 16일 '봉황대기' 두 번째 무대에 나섰다. 이번엔 타자가 아니라 투수로 마운드에 섰다. 그것도 선발투수로 당당히 나섰다. 주최사 '한국일보'는 손가은의 경기 내용을 자세히 다루며 "손가은이 53년 봉황대기 역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지난해 타자로 전국대회 신고식을 치르더니 올해는 당당히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여고생이 봉황대기 마운드에 오른 것은 사상 처음이다. 비록 안타를 치지 못하고 아웃카운트를 잡지 못했지만 10대 청춘의 야구, 그 자체가 낭만적이었다"고 보도했다.

최근 손가은에게 '야구하는 그녀들' 연재의 한 꼭지 주인공이 되어 달라며 당시 일을 물었다. 손가은은 "기사가 많이 나가 친구들이 아직까지도 나를 '손스타'라고 부른다"며 쑥스러워한 뒤 "보도가 나가면서 경기장에서 행실을 더 조심하게 됐다. 그리고 더 잘해야 '여자야구' 선수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질 텐데 결국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해서 여전히 아쉽다"고 말다.

악플도 많았지만, 여성으로서 남자 엘리트 고교야구 무대에 '도전'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 손가은은 "앞으로 더 많은 여학생들이 자신 있게 고교 무대에 도전해, 내가 이루지 못한 안타를 꼭 쳐내길 바란다"며 웃었다.

기자로서 뿌듯하고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많지만, 손가은 '단독' 보도는 필자 스스로 '잘했다'고 느낀 일이다. '여자야구'에 관심이 없었다면 그저 흘러 지나가 버렸을 한 야구 소녀의 위대한 도전이 기록으로 평생 남게 됐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몇 안 되는 야구 유소녀들의 마음 속에도 고교야구 무대에서 안타 하나, 삼진 하나를 잡겠다는 불씨가 일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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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여자야구 손가은 고교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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