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15분. 압도적 러닝타임이다. 숏폼(Short-form)에 길들여진 현대인을 상대로, 현재 일반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로는 가히 실험적인 이 도전이 어쩐지 반갑다. 영화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의 긴 상영 시간은, 평소 길이가 짧은 콘텐츠에 몰두하던 관객들이 영화 속 공간의 질감을 '몸으로' 체험하기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다.

영화 속 인물이 브루탈리즘(Brutalism) 건축의 거대한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무력감은 관객의 지친 시선과 맞물리며 더욱 강렬하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의 창의적 욕망이 그 안에서 관객과 함께 꿈틀댄다.

현재 극장 상영 중인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곧 열릴,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여우조연상·감독상·각본상·촬영상·편집상·미술상·음악상까지 총 10개의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인터미션까지 느껴야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UPI 코리아

한 인터뷰에서 감독 브래디 코베(Brady Corbet)는 상영 중간에 주어지는 인터미션(intermission)도 극의 흐름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했다. 영화가 이미 수십 년에 걸친 긴 호흡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관객도 같이 느껴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영화는 전후 시대의 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의 창작 욕망과 주변 환경 사이의 긴장 관계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이민자인 그의 삶에 드리워진 고단함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삶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인물의 심리를 건축적 이미지로 치환해 카메라를 통한 내면의 균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상적인 건축물을 창작해 가는 건축가의 여정은 물리적 구조물의 구축과 해체의 반복으로 표현되며, 이 과정에서 관객은 예술가의 정신이 어떻게 외부 세계와 충돌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라즐로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공간을 창조하려 하지만, 그가 만든 공간은 곧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차갑고 무거운 콘크리트 벽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방어막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속한 시대의 폭력성과 불안을 상징한다. 거친 콘크리트와 날 것의 철근에 인간의 손길이 닿아야 완성되는 건축물은, 동시에 그 물성의 냉혹함으로 인해 창조자의 정신을 억압하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는 드러낸다. 그렇게 라즐로의 삶은 영감과 고독으로 어우러진다.

예술의 본질

영화 브루탈리스트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영화 브루탈리스트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UPI 코리아

결국 영화는 잔혹할 정도로 예술의 본질을 해부하는 동시에, 그 안에 숨겨진 인간성과 상흔을 더듬는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양식을 단순한 스타일이 아닌 존재론적 탐구의 매개체로 전환하며, 현대 영화사에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장을 열어 보인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고전이 될 운명을 타고난 듯한 영화'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덧붙이자면, 고서나 고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향기가 이미 코끝에 와있다.

새롭게 리모델링한 자신의 서재를 통해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본 백만장자 해리슨은 라즐로와의 대화에서 자주 '지적 자극'이 된다는 말을 반복한다. 인간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나름의 간편한 방식으로 지적 자극을 얻을 수 있는 건 역시 책을 읽는 것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미처 몰랐던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 자신보다 더 나은 누군가를 통해, 문화예술 향유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지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해리슨은 마치 좋은 책을 옆에 곁에 두 듯, 라즐로와의 대화를 즐겼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해리슨 자신에게 결핍된 어떤 것을 지닌 라즐로에 대한 질투나 자격지심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자신에겐 찾을 수 없는 고상함을 지닌 라즐로를 처음 본 그때부터 인정하고 싶지 않은 동경을 느꼈을 수도.

라즐로에게 건축은, 타협할 수 없는 그의 예술이었다. 자칫 배경으로 그칠 수 있던 공간은 그렇게 인물의 시대와 기억과 상흔을 담은 장소가 된다.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영화는 그 자체로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심오하고 복잡한 장소'가 됐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UPI 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언정 박사의 브런치(https://brunch.co.kr/@bu-actor)에도 실립니다.
브루탈리스트 오스카 아카데미 건축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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