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춘화연애담>
티빙 <춘화연애담> 티빙

티빙 사극 <춘화연애담>은 드라마 제목만큼이나 자유롭게 애정 풍속을 묘사한다. 춘화집 속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여줄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교제도 꽤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미혼 왕족인 화성대군(김택 분)이 기방에서 기생과 단둘이 마주보고 있고, 유생들이 창호지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며 응원한다. 유생들 옆에는 화리공주(고아라 분)도 있다. 공주 역시 관객이 돼 오빠를 응원한다.

그러나 화성대군은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기생에게 팔뚝 힘을 과시하며 "한번 매달려 볼 테냐?"라고 말한다. 화리공주는 "저런 붕신" 하며 실망한다. 6일 방영된 제1회 초반에 미혼 공주의 입에서 나온 '붕신'이란 대사는 이 드라마가 묘사할 성풍속의 수준을 예고해준다.

조선시대 성풍속이 이전보다 덜 자유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혹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춘화연애담> 수준까지 도달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숨 막힐 정도로 엄격했던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나 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사람들도 욕망의 절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인간의 본성이 과도한 억압을 당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열녀문을 둘러싼 오해

조선시대 성윤리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열녀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평균적 성윤리를 반영하지 못한다. 열녀문에는 허위나 과장도 많았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그 점을 지적했다. 그는 열녀문 건립이 진실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도 목민관의 임무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이 책 예전(禮典) 편에서 남편을 잃은 비통을 참아가며 시부모와 자녀를 부양하고 집안을 건사한 여성들이 열녀문의 진짜 주인공이라면서 지방 수령들이 이런 여성들을 발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단순히 과부가 됐다는 비통함을 견디지 못해, 혹은 죽은 남편이 너무 그리워서, 또는 남편의 사망을 자신의 탓으로 달리는 시집 식구들의 구박을 견디기 힘들어 극단적 선택을 결행한 여성들을 위해서는 열녀문을 세워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열녀문에 '인플레'가 많음을 의식했던 것이다.

100년 전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이 땅의 풍속을 세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중추원(총독부 자문기구)의 조사 자료인 <조선풍속집>이다. 이 책에도 열녀에 관한 조사 결과가 들어 있다.

<조선풍속집>은 과부의 재혼을 억제하는 사회 분위기를 참아내지 못하거나 남편 없이 시집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현실을 견디지 못한 여성들이 열녀로 포장되는 사례를 지적한다. 그런 뒤 열녀를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의 허구성을 언급한다. "효자와 열녀에 대한 정표(旌表)의 진상도 겉포장이 벗겨지면서 가치가 없어져 버렸다"고 보고한다.

성리학이 성풍속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 유교철학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조선 중기의 사회 풍경에서도 확인된다. 선조와 광해군 때의 정승인 심희수(1548~1622년)의 사례도 그중 하나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심희수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명나라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펼치고, 전쟁이 끝난 뒤에 좌의정이 됐다가 광해군 정권에서 우의정을 지냈다. 평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스물다섯 나이로 과거시험에 최종 급제했으니, 엘리트 선비 그룹으로 분류될 만했다.

그런데 1873년에 전 의령현감 서유영이 정리한 <금계필담>에 따르면, 심희수 부부는 결혼 전에 '선'을 넘었다. 전직 재상의 딸인 그의 부인은 남편을 골라주려는 아버지를 만류하고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의 필운대 바위 근처에 작은 집을 구했다. 그런 뒤 집안에서 행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남자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스무 살 전후의 심희수가 집 앞을 지나가자, 이 여성은 생전 처음 보는 남자를 붙들기 위해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뒤 말을 걸었다. <금계필담>은 "마침내 그를 불러들여 정을 통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열애에 빠진 두 사람은 그 뒤 심희수의 수험 생활을 위해 몇 년간 헤어졌다가 합격한 뒤에 식을 올렸다.

사랑 쟁취하려 담장 넘은 여성

 티빙 <춘화연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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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영이 심희수 부부의 연애사를 소개한 것은 '이 사람들처럼 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서유영은 그 부인이 심희수를 급제시키기 위해 몇 년간 떨어져 지낸 것을 높이 평가했다. 부인의 지혜와 결단에 후한 점수를 주고자 그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심희수의 부인은 <춘화연애담>의 등장인물들보다도 자유로웠다. 이런 부인의 연애사를 전직 관료가 아무렇지도 않게 기술하고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서양문화가 본격 유입됐으므로, 서유영이 책을 쓴 1873년은 전통적 가치관이 아직 강할 때였다.

이 해는 미국과의 전쟁인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2년 뒤다. 그래서 선비들 사이에서 외세 배척이나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이런 시기에 내놓은 책에서 심희수 부부의 혼전 관계를 자연스럽게 기술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꽉 막히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기술 태도는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세종대왕 시대의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를 좋아한 여성도 <춘화연애담>을 뺨쳤다. <어우야담>은 이렇게 알려준다.

"(정인지가) 늘 바깥채에 거처하면서 밤늦도록 책을 읽었는데,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집에 처녀 하나가 있었다.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며,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거족의 딸이었다. 처녀가 틈새로 훔쳐보니, 미소년 하나가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고 있었다. 마음으로 사모해 담장을 넘어가 그를 가까이하고자 했다."

명문가 여성이 밤중에 담장을 넘었다. 성리학이 넘지 못하는 담장을 그는 넘었다. 성리학의 규제력이 그렇게 막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런 사례는 여타 선비들의 기록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정인지는 월담한 여성을 간신히 설득해 '철수'시켰다. 정인지가 그렇게 한 것은 그의 성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홀로 계시기 때문에, 혼처를 구해도 응하는 사람이 없네요", "장가들어 좋은 아내를 얻고 싶어도 아가씨 같은 사람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라는 하소연에서 나타나듯이, 정인지는 집안 간의 격차를 의식했다. 다음날 정인지는 어머니를 설득해 집을 팔고 그 동네를 떠났다고 유몽인은 썼다.

이런 사례들에서 확인되듯이, 성리학은 성풍속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했다. 성리학의 영향력에 대한 과도한 평가는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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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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