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합니다. 남녀관계의 사랑만을 대우하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대중문화를 향해 퀴어의 관점으로 질문을 던져 봅니다.[편집자말]
2인 가구로 살림하다 보면 곤란할 때가 종종 생긴다. 요즘 같이 고물가와 불경기가 이어질 땐 마트에서 장을 보면 만족스러운 식재료를 구하기가 어렵다. 특히 감자나 양파 한 묶음을 다 먹을 수가 없어서 낱개로 구매하려고 하면 어떤 이유인지 판매하지 않거나 세척 후 개별 포장했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비싸지기도 한다.

이럴 바엔 '그냥 시켜 먹는 게 낫다'라는 생각이 들거나, 조리 후 포장 판매하는 요리를 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그럴 때는 드라마 <어제 뭐 먹었어?>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주인공과 이웃 주부는 절반씩 돈을 내고 대용량 식재료를 필요한 만큼 나눠 갖는다. 게다가 드라마의 주인공은 게이 커플이다.

도시 중년 게이 커플의 삶

 <어제 뭐 먹었어?>는 직업이 변호사인 중년 남성과 동거 중인 애인과 저녁 식사를 위한 요리를 하는 일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제 뭐 먹었어?>는 직업이 변호사인 중년 남성과 동거 중인 애인과 저녁 식사를 위한 요리를 하는 일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도키엔터테인먼트

변호사 시로(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살림에 능숙한 미중년 게이다. 부모님에게 일찍이 커밍아웃하고 인정을 받았지만 직장에는 아직 밝히지 않았다. 준수한 외모와 스펙에도 불구하고 주위로부터 노총각이라는 오해를 받는 게 나름의 고민이다. 반면, 그의 파트너 켄지(우치노 세이요)는 커밍아웃한 미용사로, 겉모습으론 영락없는 아저씨지만 내면에 소녀 같은 감수성이 있는 다정다감한 인물이다.

드라마 <어제 뭐 먹었어?>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도쿄의 한 작은 아파트에 사는 중년 게이 커플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따뜻한 음식을 향한 애정이다. 호화로운 음식이 아니라 저렴하고 비교적 만들기 쉬운 간단한 요리다. 요리하는 쪽은 주로 시로 쪽이고, 켄지는 그에 보답하듯 항상 맛있게 먹는다. 이 커플은 매일 저녁 식사를 앞두고 오늘은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번 주말엔 무엇을 할지 등을 고민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둘의 모습은 아시아 국가에 사는 중산층 게이 커플의 현실적인 모습에 가깝다. 파트너를 위한 헌신과 각자의 직장에서 성실하게 생활하고, 저축을 위해 습관적으로 생활비를 아끼는 모습 등이 그렇다. 드라마는 모범적인 게이 커플의 일상을 담는 동시에 게이 커플의 현실적인 문제도 비춘다. 서로의 부모님과 상견례 하는 에피소드를 비롯해 파트너의 죽음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성소수자라면 외면하고 싶은 현실적인 두려움을 담는다. 이런 면에서 드라마는 선구자적인 '퀴어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어제 뭐 먹었어?>에 등장하지 않는 건 스킨십과 성적인 묘사다.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는 드라마 특성상 전 세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어느 정도 시청자들의 정서에 맞추지 않았을까 싶다. 동시에 이런 점이 반갑기도 했다. 동성애를 단순히 성적인 이끌림으로만 생각하는 편견을 부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채 일상을 나누는 동성 커플의 모습은 그래서 반가웠다.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

 <만들고 싶은 여자와 먹고 싶은 여자>는 도시에 혼자 사는 두 여자가 함께 집밥을 만들어 먹으며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린다.
<만들고 싶은 여자와 먹고 싶은 여자>는 도시에 혼자 사는 두 여자가 함께 집밥을 만들어 먹으며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린다.NHK

음식과 함께 그려지는 여성 커플의 이야기도 있다. 30대의 평범한 직장인 노모토(히가 마나미)는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요리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푼다. 그녀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카스가(니시노 에미)는 먹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한다. 일반 음식점에 가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같은 돈을 내고도 남자보다 밥을 적게 주는 것에 분개하는 캐릭터다.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각기 다른 성향인 두 사람은 노모토가 만들고 남긴 음식을 우연히 카스가에게 나눠주며 가까워 진다. 1인 가구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고충에 공감하는 두 사람은 이후로도 요리를 같이해 먹고, 도움이 필요한 날엔 서로 돌봐주는 느슨한 연대를 쌓아간다.

드라마의 시즌 1에는 요리를 통해 호감을 주고받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지만, 시즌 2부터는 본격적으로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레즈비언으로서의 사랑을 키워 나간다.

드라마 <만들고 싶은 여자와 먹고 싶은 여자>는 여성과 요리라는 주제를 통해 여성들의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충과 현실을 부각한다. 전통적인 일본의 관습에 따르면, 여성의 요리는 '음식은 미래의 남편이나 가족을 위한 것'이지만, 여주인공들은 자기를 위해 요리하고 먹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평범한 저녁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먹고 싶어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힌다. 부동산 중개인으로부터 2인이 함께 집을 구하는 가족이나 결혼을 전제로 한 이성 커플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좌절한다. 중개인으로부터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요?'라는 물음에 "친구 사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동성결혼 제도 없이 사회 곳곳에서 당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일본의 퀴어 요리 드라마

 2007년부터 현재까지 연재중인 동명의 요리만화(작가 요시나가 후미) 원작의 <어제 뭐 먹었어?>는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돼 큰 사랑을 받았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연재중인 동명의 요리만화(작가 요시나가 후미) 원작의 <어제 뭐 먹었어?>는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돼 큰 사랑을 받았다.도키엔터테인먼트

두 작품 모두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데, 만화는 계속 연재 중이다. 이에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유지된다. 원작자는 성소수자의 삶을 둘러싼 환경이나 고민을 충분한 조사를 통해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극 중 성소수자 차별 발언을 하는 정치인의 멘트를 뉴스 속에 넣거나, '일본에서는 왜 아직도 동성 결혼이 안 되는지'라고 자문하는 부분 등은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안정적인 성소수자 커플의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게이 정체성을 깨닫고 처음 본 퀴어 영화에는 어두컴컴한 종로 뒷골목에서 술을 마시며 하룻밤 상대를 찾는 게이들의 삶이 담겼다. 영화 속 게이들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막 성인이 된 나는 '나도 저들처럼 되는 걸까'라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 속 삶이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성소수자가 접할 수 있는 관련 콘텐츠가 한정적인 상황에서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이들의 모습은 그대로 '성소수자의 삶'으로 해석될 수 있어 우려된다. 동시에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은 일부 퀴어 콘텐츠의 내용과 이미지 만으로 성소수자를 정의해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더 다양하고 지속 가능한, 일상적인 퀴어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위의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일상을 마치고 마주 앉아 하루를 마무리한다.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그렇게 함께 연인의 시간을 보낸다. 실제 성소수자의 사랑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극적인 매운맛 대신, 잔잔하게 흘러가는 퀴어의 사랑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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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스 에디터. 도시생활자를 위한 팟캐스트 <개인사정>을 진행하며, 에세이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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