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다. 요즈음 극장가에서 자주 접하는 목소리다. 개봉 신작이 줄줄이 죽을 쑤고 영화사마다의 기대작을 올해나 개봉하면 다행이라 자조하는 상황에서 유독 재개봉작이 빛을 보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올 초 재개봉한 <러브레터>와 지난해 말 재개봉한 <더 폴: 디렉터스 컷>은 독립영화 대박의 기준선이라는 관객수 1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더 폴: 디렉터스 컷>의 경우엔 시간이 갈수록 흥행세가 뜨거워지는 이색적인 장면까지 빚어내고 있다. 적잖은 영화팬들은 흘러간 좋은 작품을 다시 발굴해 상영해주는 재개봉 풍토를 반기기까지 한다. 한국 영화판엔 명작 재개봉을 기다리고 그와 같은 기획을 응원하는 마니아층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올해 재개봉작 열풍은 어느 한 두 작품의 이례적 성취가 아니다. 현재 상영 중인 재개봉작이 10편을 헤아린다. 그 대부분이 들인 돈 이상을 뽑아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멀티플렉스 3사가 각기 힘을 싣는 재개봉작이 따로 있고, 이들 모두가 썩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있단 점도 흥미롭다. 가만히 통계를 살피다보면 들어가는 돈이 적고 흥행면에서도 나쁘지 않은 재개봉작을 일선 배급사와 극장이 검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이른다. 말하자면 시장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 500일의 썸머 > 포스터
롯데컬처웍스
겨울의 끝에서 재개봉한 네 번째 썸머
이달 재개봉한 < 500일의 썸머 >는 단골 재개봉작이라 해도 좋다. 2009년 작인 이 영화는 지난 2016년과 2021년, 그리고 올해까지 무려 세 차례나 재개봉했다. 그때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2010년 첫 개봉 당시 관객수 13만 7500명의 기록을 2016년 첫 재개봉에서 넘어섰을 정도다. 제목에 여름을 뜻하는 '썸머(summer)'가 들어간 탓인지 여름철마다 재개봉작으로 검토되던 작품인데, 이번엔 겨울의 복판에서 등판했을 만큼 근래의 재개봉 흐름이 뜨거워 더욱 관심이 간다.
< 500일의 썸머 >는 누적관객수 31만 명을 일찌감치 넘어섰다. 일일 박스오피스 상위 10편 안에도 안착했다. 재개봉작이 대개 그렇듯 작품성이 검증된 명화란 점이 이 같은 인기를 뒷받침한다. 여기에 더하여 근래 개봉한 신작 가운데 관객에게 호소력 있는 멜로가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다시 돌아보도록 이끈다.
가만 보면 < 500일의 썸머 >는 이 시대에 유효한 생명력을 가졌다. 남녀간의 관계맺음, 그 속에서의 미숙함과 성숙함을 돌아보도록 이끈다. 생각해보면 2025년 현재 화제가 되는 예능프로그램 상당수가 연애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아닌가. 저마다 부족한 곳 많은 남녀가 나와 관계를 모색하는 가운데 좌충우돌 서로의 모자람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재미를 자아내는 프로그램들이 이 시대 예능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이 시대 대중의 관심이 있을 텐데, < 500일의 썸머 >가 겨냥하는 곳이 꼭 그러한 지점이 아닌지.
▲< 500일의 썸머 > 스틸컷
롯데컬처웍스
운명적 사랑과 현실적 연애 사이
영화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청년 톰(조셉 고든-레빗 분)이 현실적인 여자 썸머(주이 디샤넬 분)를 만나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의 대사이자 홍보문구로도 활용된 'Boy meets girl. Boy falls in love. Girl doesn't.(남자가 여자를 만났다. 남자는 사랑에 빠졌다.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는 이 영화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준다. 남녀가 만나는 로맨스물의 클리셰라고까지 불리는 앞의 두 문장 뒤에, 그러한 영화에서 좀체 만날 수 없는 세 번째 문장을 붙임으로써 통상의 로맨스가 다가서지 않는 진실을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이 영화의 성공비결이 되었다.
톰은 썸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우울한 브릿팝을 즐겨 듣는 소극적인 남자 톰이 제가 다니는 회사 사장 비서인 썸머에게 반한다. 우연히 같은 엘리베이터에 탄 그녀가 톰이 듣던 노래를 듣고 건넨 "저도 이 노래 좋아해요"란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수줍음 탓에 좀처럼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던 톰이지만 회사 동료의 기여로 어찌저찌 제 마음을 표하고, 그 대가인지 썸머로부터 입맞춤을 받는다.
그로부터 시작된 관계는 모두의 예상과는 딴판으로 돌아간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만남에 골인하면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류의 결말로 이어지는 게 흔한 로맨스영화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전혀 그러하지가 못하다. 이유는 명확하다. 썸머와 톰은 도저히 맞지가 않는 것이다. 크게는 연애관이, 작게는 일상의 소소한 태도들이 그러하다.
▲< 500일의 썸머 > 스틸컷
롯데컬처웍스
기대는 훼손되고 관계는 끊어지지만
영화는 인연이며 관계, 운명과 같은 거창한 것부터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반응에 이르기까지 둘의 차이를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톰의 시선에서, 또 그를 벗어나서 보여주는 둘 사이의 일들은 이들이 어째서 서로의 짝으로 남을 수 없었는가를 알도록 한다.
영화 속 많은 순간들은 꼭 그와 같은 경험은 아니라도 사랑을 하고 그를 잃어본 모든 이가 공감할 밖에 없을 만큼 일반적인 것들이다. 상대보다 그를 더 사랑하거나 그렇지 못할 때, 나의 기대가 충족되거나 그렇지 못할 때, 그에게 관심이 일어간 그렇지 못할 때, 내 감정에 치우쳤거나 그렇지 않을 때 이뤄지는 관계의 양상들이 톰과 썸머 사이에서 거듭 일어난다. 기대는 끊임없이 훼손되고 관계는 진전되지 않는다. 연인에게 구속받고 싶지 않다는 썸머의 말을 톰은 끝내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둘은 마침내 이별한다.
< 500일의 썸머 >는 얼핏 만나고 헤어지는 커플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영화 가운데 이별의 책임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톰의 미숙함을, 그에게 마음을 온전히 내주지 않은 썸머를 탓하며 그 이유를 나열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톰은 겁 많고 소극적인 인간이 되고, 썸머는 저 좋다는 남자를 두고 재고 따지는 여자가 된다.
▲< 500일의 썸머 > 스틸컷롯데컬처웍스
실패와 성장, 그 가운데 나의 연애를 발견하는
그러나 영화는 그저 헤어지는 커플, 이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썸머 앞에 500일이란 기간을 단 제목처럼, 영화의 절반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 그들 사이에 주어진 시간을 건너 톰은 운명을 믿지 않는 남자가 된다. 앉아서 제 짝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가서 손을 건네는 사내가 되는 것이다.
반면 구속되길 싫어했던 썸머는 제게 맞는 짝을 찾아 결혼까지 한다. 구속이 아닌 선택, 미래를 함께 할 단 한 명의 동반자를 찾는다. 서로를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둘은 서로가 처음 있던 곳에서 정 반대 방향으로 옮겨간다. 운명론자가 운명론자가 아니게 되고 운명을 믿지 않던 이가 제 운명에 감사하는 방식으로.
< 500일의 썸머 >는 시간이 사람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누구나 시간이 부리는 조화를 통해 지금과 전혀 다른 이가 될 수 있단 걸 보인다. 맞는 시간에 맞는 사람이기만 하다면 오늘 맞지 않는 이도 맞아질 수 있음을, 오늘 맞는 이도 내일은 맞지 않을 수 있단 걸 확인케 한다. 사람이란 결국 변하는 존재란 사실을, 그를 이해할 때에야 나아질 수 있음을 알도록 한다. < 500일의 썸머 >는 그렇게 관계에 대한 특별한 지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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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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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남자의 500일, 네 번째 개봉 이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