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재벌가의 상속녀로 꾸민 채 각종 사기 행각을 벌이며 뉴욕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애나 소르킨의 이야기는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로 제작되며 널리 알려졌다. 화제를 모았던 애나 소르킨의 실화는 2021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연극으로도 제작되었는데, 이 연극이 2025년 한국에 상륙했다.

이름은 <애나엑스>, 거짓을 일삼는 애나와 함께 스타트업 창업자 아리엘이 등장하는 2인극이다. 최연우·한지은·김도연이 애나 역을 맡았고, 이상엽·이현우·원태민이 아리엘을 연기한다. 출연진이 연극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 주로 활동하던 배우들이라는 점이 눈에 띄며, 특히 이상엽은 데뷔 18년 만에 <애나엑스>를 통해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선다.

유명 영화 번역가로 최근 공연계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는 황석희가 번역을 맡았으며, 3월 16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에서 공연된다.

 연극 <애나엑스> 공연사진
연극 <애나엑스> 공연사진(주)글림아티스트, (주)글림컴퍼니

뉴욕 사교계를 뒤흔든 사기의 전말

애나의 사기 행각이 얼마나 비범했는지, 애나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묘사하는 것은 연극 <애나엑스>의 관심사가 아닌 듯하다. 사기를 통해 애나가 얻은 이익을 실체적으로 그려내지도 않고, 애나의 의도가 악했음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작품이 공들여 그려내는 것은 애나의 사기가 성공하는 '과정'이다.

애나는 거짓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그렇게 진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을 연출한다. 극중 방백 상황에서 애나는 시종일관 자신을 '너'라며 2인칭으로 부르는데, 이는 애나라는 인물이 진짜 애나가 아닌 '만들어진 가짜'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애나는 스스로를 부유한 상속녀로 속이며 사교계 인사들을 만나고, 여러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예술계 인사들과도 접점을 만든다. SNS를 통해 자신을 더 그럴듯한 인물로 꾸며내고, 사람들은 애나가 스스로를 꾸며낸 것 이상으로 애나에게 환호한다.

이는 곧 허상을 원하고, 허상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에서 비롯된다. 알맹이가 없어도 껍데기만 그럴 듯하면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무엇보다 알맹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려 하지 않으며, 알맹이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에는 가차없이 그 사람을 비난하는 세상. 애나가 속한 세상은 이런 세상이었고, 애나는 그런 세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연극 <애나엑스> 공연사진
연극 <애나엑스> 공연사진(주)글림아티스트, (주)글림컴퍼니

이런 사회를 이해하는 데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은 상품의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기호적 가치, 즉 이미지를 소비한다고 진단했다. 이는 사람들이 명품으로 치장하고 사치를 부리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때 사람들의 자아는 사라지고 소비된 상품의 이미지로만 남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정해진 이미지에 맞춰 스스로를 꾸며내고,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을 또 다른 사람들이 따라하는 매커니즘이 완성된다. 이렇게 사람들은 실체를 찾을 수 없는 복제품으로 전락하며, 이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 시뮬라크르의 세상에서 더 이상 진짜 모습은 중요치 않다. 애나의 사례처럼 말이다.

그렇게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애나를 비난하기보다 세상을 향해 의문을 던질 것을 자극한다. 우리는 과연 진실된 모습을 원하는지, 누군가 지나치게 진실된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외면하진 않는지 묻게 한다. 허상을 원하는 건 아닌지,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허상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하게 한다.

반칙해서 성공하면 사업가가 되고, 실패하면 사기꾼이 된다는 극중 애나의 말로 <애나엑스>가 비판하는 사회상이 간명하게 요약된다. 애나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가짜가 되는 것을 종용하고 암묵적으로 허용하지만, 가짜라는 사실을 들켰을 때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세상이 우습다는 것이다.

<애나엑스>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인물, 아리엘을 통해서도 사회의 모순이 드러난다. 아리엘은 '제네시스'라는 데이팅 앱을 만들었다. 앱 자체는 기존의 데이팅 앱과 다르지 않았지만, 상류층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단지 상류층만 가입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럴 듯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리엘은 사람들이 급을 매기고 구별하는 걸 비판하면서도 무엇보다 구별 짓기에 끌린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로 그런 '인간의 본성적인 천박함'에 투자한 것이라는 아리엘의 비웃음은 사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면서, 그런 사회를 문제 의식 없이 살아가는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애나엑스> 공연사진
연극 <애나엑스> 공연사진(주)글림아티스트, (주)글림컴퍼니
공연 연극 애나엑스 LG아트센터서울 애나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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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사회를 이야기하겠습니다. anjihoon_5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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