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알못(야구를 알지 못하는)' 신입 기자였던 나는 입사 2년 여 뒤인 2024년 3월 한국야구기자회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야구기자상'(2023년도 올해의 야구기자상)을 받았다. 말 그대로 짧은 시간 안에 '최고'가 된 건 아니고, 최고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받게 된 상이라 생각한다.

2022년 1월 한 스포츠 일간지의 취재기자가 됐다. 야구장 한번 가본 적 없는데 스포츠부 야구팀에 배치됐다. 야구 인맥은커녕 지식도 '제로'. 규칙 정도만 간신히 안 상태에서 당장 야구 기사를 하루에 세 꼭지 이상 써야했다. 프로야구 경기 취재를 하며 간신히 경기 상보, 공동 인터뷰 기사 정도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야구기자로 일한 지 약 한 달이 넘었을 무렵에 든 생각이다. '더 이상 쓸 게 없는데. 내일 발제 어쩌지' 하던 차에 습관처럼 좋아하던 종목인 축구 기사란을 클릭했다. 손흥민이 이랬다더라, 황희찬이 저랬다더라... 도배하다시피 한 해외파 기사 속에서 여자축구 A매치 친선전 상보 기사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순간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동안 여자축구, 여자배구, 여자농구 기사는 봤는데, 왜 여자야구 기사는 못 봤지?'

 2023년 홍콩에서 열린 여자야구 아시안컵 당시 필리핀을 극적으로 꺾은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2023년 홍콩에서 열린 여자야구 아시안컵 당시 필리핀을 극적으로 꺾은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황혜정

내가 놓친 건가 싶어 '여자야구'로 검색해봤다. 한국엔 여자야구 프로팀이나 실업팀은 없고 사회이 야구 동호회만 있다. 신기한 건 여자야구 국가대표팀은 있는데, 직업 야구선수가 아닌 동호인들로만 구성됐다.

최근 기사는 6년 전쯤이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코로나19 펜데믹 국면이 2년 여간 이어져 단체 훈련을 쉽사리 할 수 없었다지만,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여자야구 대표팀은 아직도 존재하긴 하는 걸까? 반신반의로 무작정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이란 곳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은 사람도 취재하려는 기자의 연락 자체가 너무 오랜만인지 당황한 듯 했다. 당시 여자야구연맹 과장이던 김보미씨는 첫 통화 때 "근데 왜 취재 오시는 거예요?"라며 의아해할 정도였다. 나는 "큰 이유는 없고, 여자야구 대표팀이 운영되고 있다길래 궁금하다"면서 무작정 "훈련을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다행히 그 주 주말에 열리는 훈련에 한번 와 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 가려 했으나, 대표팀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으니 질문지를 미리 만들 수도 없었다. 생년월일과 사회인 동호회 소속팀 이름만 적힌 선수 명단을 연맹 홈페이지 공지사항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주말마다 1박2일 합숙훈련... 봄에도 벚꽃 대신 야구장으로

2022년 9월 말, 그렇게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을 처음 만났다. 선수들은 일찍 와서 트레이너와 함께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팝 음악에 맞춰 몸을 푸는 선수들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다. 무겁고 군기가 바짝 잡힌 빡빡한 훈련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그 광경을 보고 단번에 긴장이 풀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 정말 재밌을 것 같다.'

충실한 워밍업을 마치고 선수들은 본격적으로 빌딩 훈련에 나섰다. 펑고(야수가 수비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트로 쳐 준 타구를 잡는 것)를 받는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날렸다. 유니폼이 단번에 흙투성이가 됐다. 못 잡으면 웃으며 '한 번 더'를 외치며 잡을 때까지 공을 받아냈다. 진지한 훈련 속에서도 웃음꽃이 끝없이 피어났다.

고된 훈련인데 하나같이 "재밌다"고 했다. 당시 항공운항과 파일럿 과정을 밟는 대학생이던 야구 국가대표 박소연은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가장 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같이 훈련하니 재밌다. 안타를 치고, 어려운 타구를 잡아내는 움직임도 정말 재밌다"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2023년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이 세계 대회 진출권을 획득한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2023년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이 세계 대회 진출권을 획득한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황혜정

이들에게 대표팀은 소중하고 바라던 기회였다. 누구나 국가대표 자리를 마다할 사람 없다지만, 여자야구 선수들에겐 대표팀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선수들은 입을 모아 "그나마 체계적인 훈련을 밀도있게 배울 수 있는 곳은 대표팀뿐"이라고 했다.

평일에는 학교에 다니거나, 회사 직장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함에도, 주말이면 쉬지 않고 운동장에 모여 1박 2일 합숙 훈련을 받는다. 1세대 여자야구 국가대표 출신이자 당시 대표팀 트레이너로 일하던 방순진씨는 "벚꽃 축제가 한창인 3월에도 선수들은 한 명도 불참하지 않고 대표팀 소집에 응한다. 벚꽃보다 야구가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배움에 목마른 이들은 사비로 레슨장에 다니면서 야구를 배웠고, 야구 동영상, 야구 관련 서적을 꿰고 살았다. 야구를 더 잘하고 싶어서 안 찾아보고, 안 해본 게 없다고.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대표팀 최고참인 외야수 신누리(38)씨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담담히 답했다.

"사랑하는데 뭘 못할까요. 야구를 사랑하니까 그냥 하는 거죠."

느린 공 속에 담긴 그녀들의 철학이 좋다

그렇게 '야알못'인 필자는, 똑같이 '야알못'이었다가 국가대표까지 된 여자 선수들에게 야구를, 인생을 배웠다.

'초짜' 야구기자에게 이들은 너무나 기초적이기에 어느 구단 감독도 알려주지 않은 것들을 아낌없이 가르쳐줬다. 그립 잡는 법부터, 타석과 마운드에 섰을 때 심리까지. 나는 여자야구를 취재하며 선수·상황마다 사용하는 배트, 글러브, 신발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어느 날 프로야구 현장 취재를 갔을 때 키움히어로즈 내야수 최주환의 1루수 미트가 이질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최주환은 1루수를 맡은 지 얼마 안 된 선수인데 글러브가 너무나도 낡았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질문을 하니 그가 웃으며 "이 글러브엔 사연이 있다"며 특별한 이야기를 귀띔해줬다. 글러브가 다 낡아 끈이 떨어질 정도로 한 글러브를 오래 써온 여자야구 선수들을 관찰하다 보니 자연스레 얻어낸 기사거리였다.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 레슨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야구공을 던져온 투수 최송희(33)씨와 10m 거리도 던지지 못했던 외야수 안수지(36)씨가 8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30살이 넘어 대표팀에 승선했다는 이야기는 떠올릴 때마다 전율이 인다. 포수 김해리(32)씨는 웬만한 야구기자들보다 더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뛰는 선수들을 잘 아는 것 같다. 해외야구까지 다 챙겨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난해 9월, 첫 직장을 퇴사했다. 더 이상 발제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여전히 여자야구 대표팀 훈련 현장을 찾고, 선수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여자야구, 정말 재밌다. 남자 선수들처럼 시속 150km 공을 던지진 않지만, 직접 보다 보면 느린 공 속에 자신들만의 철학이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이들의 이야기는 전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2023년도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 단체 사진.
2023년도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 단체 사진.황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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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여자야구 여자야구대표팀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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