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이 이전 왕실과 다른 점은 국혼을 공개 오디션 방식으로 치렀다는 점이다. 티빙 사극 <춘화연애담>에서 수없이 언급되는 간택 제도는 이전 시대에는 없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처음에는 우리 왕조의 국혼에 죄다 모아놓고 임금이 직접 살피는 규정이 없었다"고 명시했다.

신라왕조의 국혼은 왕실 내부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간택 자체가 불필요했다. 박씨·석씨·김씨의 세 성씨에서 군주가 배출됐지만, 그렇다고 세 개의 왕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의 왕국은 하나의 왕실로 이뤄져야 하므로 한 나라 안에 세 개의 왕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조선의 혼인 방식

 드라마 <춘화연애담> 중 한 장면
드라마 <춘화연애담> 중 한 장면티빙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석탈해는 박씨인 남해왕의 사위가 된 뒤 처가의 가업을 이어받아 임금이 된 데릴사위였다. 김알지는 석탈해의 양자가 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신라 왕실은 세 혈통으로 구성됐을 뿐, 세 개의 왕실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하나의 왕실 내부에서 혼인이 이뤄졌으므로 간택 방식의 심사제도는 불필요했다.

고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대종 왕욱(추존왕)의 딸이고 제6대 성종 임금의 동생이다. 그는 왕실 밖으로 시집가지 않고 사촌오빠인 제5대 경종의 부인이 됐다. 이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고려왕조도 초기에는 신라 왕실처럼 족내혼과 근친혼을 유지했다. 그래서 간택제도가 도입될 여지가 적었다.

한국에 없었던 이 제도를 도입한 왕조는 조선이고 그 장본인은 태종 이방원이다. 음력으로 태종 11년 9월 6일 자(양력 1411.9.23.) <태종실록>은 이날 이방원이 "충신·의사(義士)의 가문에서 내사(內事)를 잘 다스릴 사람을 선택해 아뢰라"라고 지시한 사실을 알려준다. 중전을 도와 안살림을 잘 다스릴 후궁을 간택하라는 왕명이었다. 이런 시스템은 그 뒤 태종의 딸인 정신옹주의 결혼 때도 적용됐다.

지난 6일 방영된 <춘화연애담> 제2회는 중전(박선영 분)이 화리공주(고아라 분)의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 귀족 부인들의 다과회를 기획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초청을 받은 귀족 부인들은 이 모임이 사실상의 간택 자리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거부감을 드러냈다.

중전의 라이벌인 후궁 김씨(박솔미 분)의 처소에 모여든 귀부인들은 "중전마마의 다과회 초청장을 받은 이들이 죄다 혼인 적령기의 부마 후보자 가문이 아니 옵니까?", "말이 좋아 다과회지 부마 간택의 자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라며 경계심을 표한다. 그들은 화리공주가 얌전하지 않다면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결국 이들 모두는 중전의 초청을 외면했다.

실제의 조선시대 양반들도 국혼 간택에 대해 대체로 거부감을 나타냈다. 거부감을 표한 사유는 위 드라마와 다소 다르지만, 간택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태도는 조선왕조 내내 유지됐다.

정조의 손녀이자 순조의 딸인 명온공주의 남편을 선발할 때는 전국의 지원자가 17명이었다.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의 국혼 과정을 담은 <헌종대왕 가례의궤>에 따르면, 1837년의 헌종 국혼 때는 전국 지원자가 12명이었다. 고종의 아들인 세자 이척(훗날의 순종)이 혼인한 1882년에는 25명이 지원했다.

인조 1년 윤10월 27일 자(1623.12.18.) <인조실록>에 의하면, 인조 때는 사대부 가문들이 국혼을 기피하는 바람에 한성부에서 극단의 조처를 취했다. 한성부 관원들이 시각장애를 가진 무속인들을 동반하고 가가호호 방문하는 일이었다. 집안에 처녀가 있는지를 점칠 목적으로 무속인들까지 동원했다.

비용 많이 드는 결혼

 드라마 <춘화연애담> 중 한 장면
드라마 <춘화연애담> 중 한 장면티빙

사대부들이 왕실 사돈이 되기를 거부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비용이 많이 들었다. 간택 심사장에 가려면 몸종·유모·미용사가 있어야 했고, 가마도 준비해야 했다. 가마를 끌려면 인력도 충원해야 했다.

최종 합격자가 사전에 내정되는 일이 많아 하나마나한 지원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거기다가 왕실과의 혼인은 모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정쟁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집안이 풍비박산될 수도 있었다.

오디션 방식이 주는 거부감도 컸다. 배우자로 뽑아달라며 사주단자를 내밀고 궁에 가서 심사를 받는 방식은 사대부 가문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일로 인식됐다. <연려실기술>은 "왕비 및 세자빈·대군왕자부인의 선발을 모두 이처럼 하고 있으니 사족의 처자를 대하는 도리가 결단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왕실의 사위를 뽑는 부마 간택은 더욱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위 책은 율곡 이이가 간택의 문제점을 선조 임금에게 간곡히 지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한 여자를 위해 국내의 남자아이를 죄다 모아놓고 가려 뽑는 것은 예의의 정신에 극히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춘화연애담> 속의 귀부인들보다 훨씬 더한 거부감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처럼 거부감을 많이 주는 제도가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입되기 얼마 전인 1394년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연호를 따서 홍무 27년으로 불리는 이때부터 명나라에서는 대대적인 국혼 간택이 벌어졌다. 후비(后妃)로 통칭되는 황후와 후궁을 뽑는 간택이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2008년에 <명대 연구> 제11집에 실린 츄종린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부연구원의 논문 '명대 후비 선발 및 그 규제'는 "명대에는 전국적으로 후비를 뽑는 일이 홍무 27년에 시작됐다"고 한 뒤 대개의 경우에 환관들이 전국적으로 파견돼 예비심사를 담당했다고 밝혔다.

주원장이 전국적 범위의 오디션을 벌인 것은 특정 가문이 외척 지위를 독점하고 황제권을 위축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명문가가 아닌 일반 가문의 여성들이 황실에 시집가는 일이 많아졌다.

이방원은 1398년에 실권을 잡고 1400년에 임금이 됐다. 그런 뒤 후궁 선발 등에 간택제도를 도입했다. 왕자 시절 그는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치적 영향력에 눌려 한동안 위축됐었다. 집권 뒤에는 처가인 민씨 가문의 위세를 절감했다. 이방원의 핵심 숙원 중 하나는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고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명나라의 간택제도가 참고가 됐으리라 볼 수 있다.

국혼 간택은 이방원이 왕권강화에 절치부심하던 시기에 도입된 데다가 사대부 가문들의 위신을 존중하지 않는 방향으로 운용됐다. 그래서 이 오디션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조선왕조 후반까지도 전국 지원자가 20-30명을 넘기 힘들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도 크게 기인한다.
국혼 간택 부마 왕실혼인 춘화연애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