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봉준호가 돌아왔다. 기획부터 제작 전 과정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 해야 좋을 < 미키17 >을 통해서다. <기생충>으로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고 인지도 높은 영화제며 시상식을 싹쓸이한 그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으로 세계를 공략했다. 이번엔 그 반대다. 손흥민이 런던 축구팀에서 득점왕을 차지하고, 고선지가 당나라 대군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듯,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총지휘관이 되어서는 전 세계로 배급되는 영화 가운데 제 역량을 마음껏 펼쳐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상상치 못했을 일이다.
< 미키17 >은 SF장르 블록버스터다. 필모그래피를 뜯어보자면 특정 장르에 갇히지 않는 감독이지만 SF와 친숙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영화지만 할리우드 배우며 제작시스템을 받아들인 <설국열차>부터가 SF적 특성을 얼마간 가졌다. 보다 정확히는 디스토피아 미래상을 그렸다 해야 옳겠으나 공상적 미래에 터를 잡았으니 넓게 보아 SF라 해도 틀리지 않다. 후에 만든 <옥자> 또한 유사하다.
이번 영화는 보다 전격적이다. 우주공간으로 나아가 외계 행성을 개척한다는 설정부터가 그러하다. 봉준호의 주된 관심은 우주공간과 그곳에서 쓰이는 미래의 과학기술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세상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모습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여러 요소, 즉 독재와 광신, 몰이해에 기반한 혐오며 폭력,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이해와 사랑 따위는 모두 우주가 아니라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영화는 이 같은 요소를 굳이 저 멀고 먼 우주 어느 행성까지 찾아가 확인하려 드니 그건 그로부터 얻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실험체의 차이와 같음을 확인하는 작업을 연상케 한다.
봉준호 월드 속 영생의 저주
▲< 미키17 >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일상사 소소한 이야기를 영화적인 사건과 엮어내는 봉준호 월드의 스타일은 이번에도 유효하다. <기생충>에선 대왕카스테라 점포를 말아먹은 가장과 그 가족이었다면 이번엔 마카롱 가게 창업에 실패한 청년들이 주인공이 됐다. 햄버거가 아니라 마카롱이 뜰 거란 친구 티모(스티븐 연 분)의 제안으로 사채를 잔뜩 써서 창업한 찌질이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 분)는 그 대가로 인류사에 기록할 만한 저주를 맞이한다. 끝없는 죽음과 매번 다시 재생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비결은 휴먼프린팅 기술이다. 인간의 육신을 프린터로 뽑아낼 수 있는 미래기술로, 육체를 복제한 뒤 벽돌 한 장에 백업할 수 있는 일생의 기억을 주입하면 죽은 이와 새로 태어난 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감쪽같다. 윤리적 문제로 지구에선 금지된 이 기술이 인간 영토를 벗어난 우주공간에선 활용될 수 있다는 게 < 미키17 > 속 설정이다. 사람이 죽어도 되살릴 수 있다니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우주개척 작업에서 탐낼 수밖에 없다. 광신적인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우주개척을 이끄는 정치인 마셜(마크 러팔로 분)은 제 탐험대 한자리를 휴먼프린팅에 동의한 일꾼으로 채워 넣는다. 극한 상황마다 앞으로 내몰려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극악의 일자리에 꼭 한 명만이 지원하니 그가 바로 미키다.
미키의 직업이 바로 익스펜더블(expendable)이다. 군사용어로 흔히 쓰이는 이 말은 우리말로 치자면 '총알받이'쯤이 되는데,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소모병력을 가리킨다. 사채 때문에 지구에 남아도 절단이 날 처지인 미키가 지구 탈출을 위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 그로부터 끝없이 죽고 되살아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개인을 돌보지 않는 전체의 부조리함
▲< 미키 17 >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제목인 '미키17'은 열일곱 번째 미키란 뜻이다. 앞서 열여섯 번에 걸쳐 죽어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주공간에서 인간은 수행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서 그는 번번이 죽어난다. '위하여'라는 말은 대체 얼마나 이기적인가. 개인을 돌보지 않는 전체의 부조리함을 이 영화가 확인케 한다. 열 발자국 전진을 위해 수천의 병력을 죽음 앞으로 내보냈던 1차 대전 참호전을, 그와 꼭 닮아있던 한국전쟁 고지전을, 다시 그 현대적 변형이라 해도 좋을 채상병 사망사건 등 수없이 반복되는 인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미키의 활용이 이 영화 가운데 이어진다.
우주공간에서 방사능에 노출되면 몇 초 만에 눈이 머는지, 그 상황에서 보호장갑을 벗으면 어떻게 되는지, 새로운 행성 대기에 노출되면 어떠한지 따위를 알아보기 위해 미키는 거듭 죽음을 맞이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인간이 과거 다른 인간에게, 또 지금 이 순간 실험용 동물에게 행해왔고 하고 있는 실험이 떠오른다.
그와 같은 임무로부터 어떠한 존중도 받지 못하는 미키의 모습은 도리어 현실과 매우 가까이 붙어 있다. 세상은 가장 윗자리에서 모두를 선동하며 정작 위험은 얼마 감당하지 않는 마셜에게 환호한다. 그는 누구처럼 아내만 바라보는 무능하고 한심한 독재자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마치 모두를 구할 지도자인 것처럼 환호한다. 우주선 안팎에서 모두를 위해 불타고 터지고 감염되어 죽는 미키는 그것이 제 임무일 뿐인 한심한 이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험한 일을 하는 미키는 한국 사회 징병 된 청년 장병들이 존중받지 못하듯이 부려지기만 할 뿐이다.
외면하고픈 인간 존재의 특징
▲< 미키 17 >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위험한 임무 뒤 겨우 살아 돌아온 미키17과 그가 죽은 줄 알고 재생시킨 미키18이 공존하는 상황으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같은 기억과 육신을 가졌으나 자의식은 각각인 두 인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익스펜더블의 연속성이 혼돈을 겪을 수밖에 없다. 마치 멀티버스가 존재하는 순간 낭만이 급격히 떨어지는 수퍼히어로물처럼 말이다.
< 미키17 >은 금단의 과학기술이 인간 존엄을 침범할 때 생겨날 수 있는 문제들과 인간이 이미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한 작품 아래 두루 담아냈다. 인간이란 종이 저보다 약한 이를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익스펜더블인 미키, 또 다른 행성에서 만난 지적생명체 크리퍼를 통해서 내보인다. 그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소스의 재료쯤으로 대해지는 생명체 크리퍼, 먼저 행성에 터 잡고 살던 원주민임에도 청소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그들을 통해 <기생충>과 <옥자>에서 내보인 문제의식을 다시금 활용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복장을 하고 주인집 파티에 등장했던 <기생충> 속 기택(송강호 분)과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성을 갖춘 생명체임에도 고기가 될 재료쯤으로 여겨지는 <옥자> 속 옥자의 모습이 < 미키17 >의 크리퍼와 미키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거듭 선을 긋고 나누어 저 아닌 쪽을 핍박하는 존재인가. '화이트한 세상'을 꿈꾼다는 정치인 마셜이다. 인간과 다른 종뿐 아니라 인종과 인종 간에도 선을 긋고 우수하고 그렇지 못한 유전자를 나눈다. 크리퍼와 같은 동물과 인간의 구분에서 그치지 않고, 흑과 백,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잘 생기고 유능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나눈다.
영화 속 상상과 현실, 그 민망한 경계
▲< 미키 17 > 포스터워너브라더스
마셜의 캐릭터가 과장돼 있다곤 하지만 인간사회 가운데 흔히 발견되는 특성이다. 마셜의 직업을 정치인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기생충>에서 계급과 일상화된 구분,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부조리까지를 지적으로 폭로한 봉준호다. < 미키17 >를 <옥자>와 <설국열차>, <기생충>까지의 문제의식을 한 데 녹여낸 종합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현실과 상상을 적절히 섞은 독창적 작품이다. 그 가운데 현실은 인간이 저와 저 아닌 것을, 심지어 같은 인간 가운데서도 구분 짓고 착취하며 살해하기까지 하는 존재란 점이다. 소스로 상징되는 '더 나은 맛'을 위하여 인간은 다른 존재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단 걸 영화가 내보인다. 아니, 영화 초반 사채업자들과의 조우 신에서 보듯, 그저 즐거움을 위해서도 인간은 다른 존재를 해할 수 있다. 인간의 문명이란 대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봉준호는 다시금 설한다.
그렇다면 판타지, 즉 상상은 무엇인가. 이 영화가 마침내 도달하는 악의 혁파, 선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사회를 다시 정의롭게 하겠다는 의지, 그를 현실로써 이뤄낸 정치적 승리 따위가 바로 판타지가 아닌가. 인간이 사는 오늘의 세상과 우리가 걸어온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라면, 크리퍼와 인간이 공존하고 익스펜더블이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며 정의가 퍼져나가는 < 미키17 >의 엔딩이 민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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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죽자마자 살아나는 남자, '봉준호 월드' 완결판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