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위기', '투자배급의 위기'라는 말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영화산업을 지탱하고 함께 일궈 온 영화인들을 소개합니다.[기자말]
 플레인 아카이브 백준오 대표.
플레인 아카이브 백준오 대표.이선필

누가 요즘 영화를 블루레이나 DVD로 보는가? 사실 이 질문은 뻔하다. 20년 전 호황이었던 그때 이후로 급격하게 물리매체 수요가 줄면서 항상 나오는 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국내 DVD·블루레이 시장의 한 축을 맡고 있는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백준오 대표도 항상 그 질문을 받아왔다. 2013년 본격적인 DVD 타이틀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사양 산업'에 왜 뛰어드냐는 말을 들었다.

그 사양 산업에서 10년 넘게 버텼다. 버텼다는 표현보단 '지속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플레인아카이브에서 발행하는 DVD와 블루레이 패키지만의 특별함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영화팬들의 마음을 사 왔으니 말이다.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를 시작으로, <올드보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폭스 캐처>, <캐롤>, <걸어도 걸어도>, <벌새>, <리틀 드러머 걸> 등. 플레인아카이브가 재해석하고 제작한 아트 커버와 디자인은 영화 마니아 사이에선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상품으로 각인됐다.

블루레이 시장이 지속할 수 있는 비결

경기도 파주 플레인아카이브 사무실 근처에서 백준오 대표를 만났다. 재고 정리 때문에 난장판이라는 이유로 사무실이 아닌 명필름 아트센터 카페로 안내한 그는 새로운 타이틀 작업에 한창이었다. 넷플릭스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아케인>의 블루레이를 제작 중이라고 했다. 맞다. 마니아들 사이에선 스테디셀러인 게임 '롤'(리그 오브 레전드)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플레인아카이브의 첫 글로벌 프로젝트이자 OTT 프로젝트기도 했다.

"전부터 OTT 콘텐츠의 블루레이화를 추진했는데 여러 이유로 잘 안 되긴 했다. 스트리밍 서비스 산업의 첨병을 자처하는 주요 OTT 업체들이 아무래도 블루레이 디스크같은 레거시 미디어와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니까.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외화 수입도 많이 줄고, 한국영화 제작도 줄면서 작품 수급이 어려웠다. 영화가 개봉해야 블루레이도 만들 수 있는데 편수가 줄었으니...

그래서 넷플릭스와 국내 OTT 업체와 협업하려 했는데 가시적 성과는 없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아케인>의 블루레이를 제작할 기회가 찾아왔다. <아케인>의 스트리밍 독점 배급권을 가진 넷플릭스가 아닌, 작품의 메인 제작사인 라이엇 게임즈(RIOT GAMES)로부터 전세계 홈비디오(물리매체) 판권을 획득한 미국의 애니메이션 전문 배급사 '지키즈'(GKIDS)를 통해 먼저 제안이 온 것이다.

우리가 제작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 블루레이 한정판을 봤다더라. 한국이 온라인 게임 시장 강국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롤' 플레이어인 '페이커'의 인기도 언급하면서 꼭 한국판 블루레이를 우리와 함께 내고 싶다고 하더라."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블루레이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블루레이플레인아카이브

영화와 달리 OTT 콘텐츠는 집에서 리모컨만 누르면 볼 수 있는데 과연 블루레이 타이틀의 수요가 있을까? 백 대표는 "우선 화질과 음질 차이가 엄청 크다. 이게 물리매체의 장점"이라며 "물리매체만의 핵심 경쟁력이랄 수 있는 부가영상, 그중에서도 3시간이 넘는 제작기 영상의 완성도가 어마어마하다. 퀄리티 면에서 지난 30년간 접한 수많은 부가영상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역대급 수준"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 블루레이 시장이 지속할 수 있는 비결 일부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현재 플레인아카이브 온라인 상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타이틀이 <유열의 음악앨범>이다. 그 안에 담긴 4K 화질의 영상과 월등한 음질이 동남아 지역 팬덤과 맞물리며 큰 반응이 일어난 경우다.

"최근 전략적으로 공들이고 있는 사업이 4K UHD 블루레이다. 국내 최초 자체 기술로 제작된 4K UHD 블루레이 타이틀인 <독전>을 시작으로 이후 다수의 블루레이 제작과 출시를 지속해왔다. CJ ENM 의뢰로 제작을 대행했던 <기생충>은 해외 각국에 출시된 다양한 4K 블루레이 판본 중에서 최고 수준의 화질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본국인 일본에서도 출시되지 않은 4K UHD 블루레이를 제작해 큰 반향을 얻었다.

물론 유력 글로벌 OTT 플랫폼들도 핵심 오리지널 작품들 스트리밍 품질 관리에 애를 쓰는 추세이지만, 물리매체만의 독보적 장점을 어필할 수 있도록 4K 영상과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 등 OTT 콘텐츠 대비 기술적·품질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프리미엄 퀄리티의 디스크 매체 출시에 전력을 다 하고 있다.

물리매체 기반의 홈비디오 시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DVD 시절부터 오랜 세월 블루레이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수집을 지속하고 있는 40~50대의 콜렉터들은 이 시장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지만, 점점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범위 안에 들어오는 작품을 선별적으로 소장하는 합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블루레이 소장의 요인이 물리매체 그 자체보다는 작품 혹은 배우에 대한 팬으로서의 애정이 우선인 팬덤 소비층은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소유하고 있지 않아도 대상에 대한 일종의 응원과 지지를 표한다는 차원에서 선뜻 디스크 매체를 구매하기도 한다.

처음엔 손에 쥘 수 있는 블루레이 패키지를 구매했다는 것만으로 소장의 뿌듯함과 재미를 찾다가도, 결국 전용 블루레이 플레이어나 노트북에 장착하는 블루레이 ODD 드라이브를 구매해 디스크를 재생해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 취미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게 물리매체 시장의 소비층이 확장되는 측면도 제법 있다."

기본엔 충실, 사업은 다각화... 아이디어 싸움

 영화 <기생충> 각본집
영화 <기생충> 각본집플레인아카이브

해외 영화팬 사이에서도 플레인아카이브가 유명한 이유는 앞서 말한 이들의 독특한 디자인과 패키지 덕이다. 일례로 <폭스캐처>의 경우 영국 유명 작가 조너선 버튼의 독자적인 일러스트를 담아 넣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는 연필화로 잘 알려진 황미옥 작가가 참여해 희소성을 더했다. 상업영화부터 작가주의 영화까지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의 작품 선정도 인기 요인 중 하나다.

"해외팬들 사이에선 역시 박찬욱 감독 <올드보이> 혹은 나홍진 감독 <추격자> 같은 작품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K-익스트림' 한국영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우리가 출시한 <악마를 보았다>, <부산행> 같은 블루레이가 해외 고객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시에 해외에서 평범하게 출시되는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를 상업영화 타이틀 못지 않게 공들여 제작하는 우리 블루레이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웬디와 루시>나 <캐롤> 같은 영화가 그런 경우다. 재발 재발매해달라고 지금도 요청이 온다.

또한 최근 K 콘텐츠 인기와 더불어 동남아 팬덤이 확고하다는 믿음을 갖고 4K UHD 블루레이 제작을 과감하게 투자한 경우도 있는데, 김고은·정해인 배우 주연의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렇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판매 비중이 특히 높았다. <작은 아씨들>은 30만 원이 넘는 고가임에도, 해외 팬들이 구매 방법을 꾸준히 문의한다. 넷플릭스가 해외 시장 독점 배급권을 가지고 있어서 해외 판매를 우리가 못한다."

좋은 선례들을 얘기했지만 백준오 대표는 블루레이 타이틀 10개를 만들면 그 중 7개는 손해 보는 장사라고 했다. 이런 사업적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 플레인아카이브는 출판, 음반, 영화관 굿즈 등 영화를 테마로 한 관련 사업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2017년 영화 디자인 전문 업체 프로파간다와 함께 만든 레코드 레이블 PPR의 이름을 걸고 <족구왕>, <셔틀콕>의 OST 음반을 출시한 그는 이후 <독전>, <리틀 포레스트>, <윤희에게>, <더 콜>의 OST 음반을 LP와 CD로 선보여왔다. 최근 출시한 <헤어질 결심> OST LP 앨범은 예판 시작 1분 만에 1천 장이 품절되는 등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8년 전부터 시작한 영화책 출판 사업은 홈비디오와 함께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백준오 대표는 "2019년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 <기생충> 각본집, 스토리보드북 세트를 출간했는데 영화의 성공과 함께 출판 시장에서도 전국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출판 사업 시작 4년 만에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며 "무엇보다 이 책의 출간 직후 시작된 길고 긴 팬데믹 시절, 극심한 불황 속에서도 회사를 운영해나가는 데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출간한 <기생충> 각본집이나 을유문화사가 출간한 <헤어질 결심> 각본집, 김영사에서 출간한 <그 해 우리는> 드라마 대본집 등의 책들이 출판 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이후 영화 각본집, 드라마 대본집 시장이 부쩍 성장했다. 특히 13만 부가 넘게 팔린 <헤어질 결심> 각본집 사례 이후 흥행한 영화나 팬덤이 높은 스타 배우가 출연한 각본집 판권을 따내기 위한 출판사들 간의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지금은 다소 소강 상태이긴 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위 팔릴 만한 영화나 드라마의 각본집 출판권은 수천만 원의 높은 선인세를 제시해야 하는 등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 D.P. >, <길복순> 각본집이나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 영웅> 대본집 등을 통해 OTT 플랫폼과의 출판 협업을 지속하면서 점차 출판 라이브러리를 늘려가고 있다."

( * "OTT로 영화 보는 시대, 지금도 이 사업하는 이유는..." https://omn.kr/2cakd 기사로 이어집니다.)
플레인아카이브 블루레이 영화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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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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