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음악이랑 한국 춤이랑 같이 하니까 너무 좋았다. 친구들도 다른 언어인데, 우리 아프리카 친구들이랑 한국 친구들의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 한국 친구들에게도 아프리카 언어가 완전히 어렵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열심히 배워서 따라해서 너무 좋았다. 왜냐면 사람들은 다 똑같기 때문이다." (음악감독 살리푸 디아바테)
하지영
지난 15일, 서울 대학로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진 <피안의 여행자들>(예술감독 장혜림)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무용작품 중 하나다.
무용을 제작한 '99아트컴퍼니'가 '2023 서울예술상 대상'과 '2024 한국무용제전 최우수상' 등 최근에 연이어 수상한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재작년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에게 수여하는 '2023 서울예술상'에 대한 관심을 등에 업고 지난해 문을 연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의 개관페스티벌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의 개관페스티벌인 <형형색색>(2024년 10월22일~11월15일)에서 선보인 99아트컴퍼니의 <제(祭), 타오르는삶>을 보고 장혜림 안무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에 단체를 두고 '영혼에 울림을 주는 춤'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무용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현대적 스타일과 방법론을 고민"한다고 소개했는데, 당시 공연을 보고 한국무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그의 노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쩌면 장혜림 안무가가 <제(祭), 타오르는삶>을 비롯해 <심연>, <침묵>, <이야기의 탄생> 등 국내·외에서 경쟁력을 갖춘 무용 작품들을 꾸준하게 올린 것도 이런 노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무용에서 머물지 않고 다양한 예술장르와 협업을 시도함으로써 무용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힘 쏟고 있다.
낯선 이주자의 떠남과 만남의 여정
"다양한 이유로 본인이 살고 있던 땅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인간 또는 비인간들이 도달할 수 없는 땅을 향해서 여정을 떠난다. 무대는 어떻게 보면 다소 답답할 정도로 천이 내려와 있다. 이렇게 한 의도는 멀리서 여행온 자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관객들이 객석에서 공들여 눈과 귀를 기울여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누군가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한눈에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낯선 이들을 공들여서 들여다보는 경험을 드리고 싶다."
지난 15일 공연을 마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예술감독인 장혜림 안무가는 작품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된 <피안의 여행자들>은 땅과 인간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영감을 받아 이주자의 떠도는 삶을 사는 모든 이에게 새로운 땅 '피안'을 제시한다.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전통음악과 한국무용의 협업을 통해 지금까지 체험할 수 없었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만들었다. 단순히 서로 다른 예술세계와 국내·외 아티스트 간의 협업이라는 특징을 뛰어넘어 색다른 지점을 확고히 만들었다. 무대 위 원형의 개축객석으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관객들을 색다른 피안의 공간으로 초대했다.
<피안의 여행자들>은 관객들에게 '떠남'과 '만남'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이 얽힌 존재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정 속에서 살아간다. 이 작품은 낯선 것 속에서 익숙함을 발견하고, 잃어버린 뿌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관객들이 자신과 타인의 연결성을 되새기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작품은 오늘날 '땅'이 가지는 의미와 정체성의 경계를 되묻는다. '피안'은 서로의 이야기와 경험이 엮여 탄생한 열린 정체성의 공간이다.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연과 과거, 미래를 잇는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발견하는 여정을 그린다.
서아프리카의 전통 음악과 한국 고유 춤의 만난다면?
▲"우리는 같이 여기에 있다. 외국인도 있고, 한국인도 있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다. 제가 한국에 오면 제가 외국인이고 한국인이 부르키나파소에 가면 그들도 외국인이다. 내가 한국사람인지 아프리카 사람인지는 필요하지 않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 색깔이 다르다? 이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도 두 눈이 있고, 들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하고 사랑하고 같이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을 만들었다." (노래 뎀벨레 아다마)
하지영
<피안의 여행자들>는 '99아트컴퍼니'가 실제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댄서 겸 안무가인 엠마누엘 사누(Emmanuel migaelle sanou), 그리오* 살리푸 디아바테(Salifou Diabate), 뎀벨레 아다마(Dembele Adama)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사전에 출연진의 소식을 들으니 필자가 2018년 추석쯤 한겨레 신문을 통해 엠마누엘 사누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당시에도 '인종주의에 차별받는 소수자의 외침'에 관한 <데게베>를 통해 이주자의 서러움을 전달했는데, 7년이 흘러도 이주자들의 고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치 않을 뿐이다.
(*그리오(Griot)는 서아프리카의 세습 음악가 일족으로, 음유시인이라고도 불린다. 관혼상제의 의례나 궁정의 악사로 활동하며, 단순한 예술가나 연주자를 넘어 문화의 수호자이자 전승로서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둔둔, 발라폰, 고니 등의 전통악기 연주와 함께 노래와 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한편 15일 공연을 마치고 주요 출연진으로 나선 두 명의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안무가이자 연주자들이 작품의 의도를 이렇게 들려줬다.
"아프리카 음악이랑 한국 춤이랑 같이 하니까 너무 좋았다. 친구들도 다른 언어인데, 우리 아프리카 친구들이랑 한국 친구들의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 한국 친구들에게도 아프리카 언어가 완전히 어렵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열심히 배워서 따라해서 너무 좋았다. 왜냐면 사람들은 다 똑같기 때문이다." (음악감독 살리푸 디아바테)
"우리는 같이 여기에 있다. 외국인도 있고, 한국인도 있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다. 제가 한국에 오면 제가 외국인이고 한국인이 부르키나파소에 가면 그들도 외국인이다. 내가 한국사람인지 아프리카 사람인지는 필요하지 않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 색깔이 다르다? 이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도 두 눈이 있고, 들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하고 사랑하고 같이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을 만들었다." (노래 뎀벨레 아다마)
우리는 '피안'으로 나아간다
▲“공연 초반에 무용수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출신을 소개한 것은 이들의 뿌리와 출신지를 밝혔을 때, 관객들도 “나의 뿌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했을까?”를 함께 생각해보길 바랐다. 피안은 이방인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땅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죽어서도 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그런 서글픈 생각을 안고 피안을 떠올렸다. 단어를 그대로 두기보다는 우리가 작품을 통해서 피안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개념을 재정립하고 싶었다. 한발짝 나아가 이곳에 모두가 담기는 순간은 오지 않더라. 혹시나 다 들어놨다 싶으면 못들어온 자들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낸 피안은 찰나의 순간이고 이것이 계속 흐르고 확장되고 무너지고 이 무너진 땅에서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예술감독·안무가 장혜림)하지영
"공연 초반에 무용수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출신을 소개한 것은 이들의 뿌리와 출신지를 밝혔을 때, 관객들도 "나의 뿌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했을까?"를 함께 생각해보길 바랐다. 피안은 이방인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땅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죽어서도 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그런 서글픈 생각을 안고 피안을 떠올렸다.
단어를 그대로 두기보다는 우리가 작품을 통해서 피안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개념을 재정립하고 싶었다. 한발짝 나아가 이곳에 모두가 담기는 순간은 오지 않더라. 혹시나 다 들어놨다 싶으면 못들어온 자들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낸 피안은 찰나의 순간이고 이것이 계속 흐르고 확장되고 무너지고 이 무너진 땅에서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예술감독·안무가 장혜림)
객석과 무대 간의 경계를 허물어 공간/시간-낯섬/익숙함-떠남/머무름이 뒤섞인 '피안'의 공간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함께 여행한다. 무대 위 원형의 개축객석은 출연자와 가장 근거리에서 호흡할 수 있다. 한국과 서아프리카의 전통공연이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예술가와 관객이 뒤섞이며 시공간을 창조한다.
그곳은 서로의 이야기로부터 탄생한 '열린 정체성'의 공간이다. 떠남은 정체성을 잃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무수한 가능성을 깨우는 시작이다. 우리는 물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흔들이며, 흔적이 쌓여 얼룩진 서로를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의 뿌리를 오가는 균사체처럼 끊임없이 속삭이며, 연결되고 모두가 숨죽이는 순간에도 새로운 세계를 향후 뻗어가는 생명이다. 고요하게 반짝이며 대지 속에서 보이는 않는 길을 내어 그렇게 서로의 기억과 꿈이 만나는 자리가 비로소 피안이 된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작업에 임했을 때의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엠마에게 부르키나파소의 전통춤을 배우고 리서치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마주했을 때, 조금 낯설고 긴장되는 순간들도 있었는데, 이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햇살같은 따듯한 에너지와 정열적인 기운들이 춤과 음악을 통해서 느껴지면서 아주 가까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땅의 의미, 문화가 다른 문화를 만나서 이 땅이 이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의미와 이들과 함께하는 의미가 깊어졌다. 그 순간이 저한테는 특별하다." (조안무가 장서이)
<피안의 여행자들>은 떠남과 도착의 경계를 허물고 시간과 공간을 건너며 벌어지는 모든 존재들의 춤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든지 기억과 꿈은 서로 얽혀 새로운 땅을 엮어낸다. 그곳에서 우리는 낯선 것을 환영하고, 익숙했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며 우리 모두가 떠나는 자이지 도착하는 자임을 노래한다. 머물 수 없는 몸은 닿을 수 없는 땅을 향해간다. 그리고 잃어버린 뿌리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현재를 깊이 들여마신다.
작품을 통해 그리는 '피안'은 단순히 다른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곳은 서로의 경험과 이야기가 얽혀 탄생한 새로운 정체성의 공간이다. 고정된 틀을 허물고 기억과 꿈이 교차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떠남과 도착의 경계를 허무는 이 여정은 정체성을 잃는 사건이 아니라 무수한 잠재력을 깨우는 시작으로 정의한다.
이 작품은 이주자들의 몸에 내재된 전통과 그들의 현재 경험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출발한다.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사이에서 형성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 이주와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정체성과 가능성을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장혜림 안무가는 이번 작품을 만드는 특별한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연습실에서 무용수들이 땅을 구르고 연습을 하는데, 나는 리허설할 때 의자가 아니라 바닥에 앉아서 보는 시점이 너무 좋다. 바닥이 울리고 어떤 때는 무용수들의 전체를 보다가 어떤 때는 땅과 밀접해있는 발의 섬세한 움직임을 본다. 관객들이 이걸 같이 봤으면 좋겠다.
관객들이 무대를 조금이라도 잘 보게하기 위해서 많아 고민했다. 처음에는 사각으로 구성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단이 있으면 우리랑 다른 지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같은 생각에 모든 것을 바닥으로 낮췄다. 천을 내리면서 무대에서 보지 않고서 연습실에서 아이디어로만 생각했을 때는 상상만 했는데, 현장에 와보니 높이와 위치가 많이 수정됐다.
처음에는 다 열었던 미지의 세계로 느껴지지 않았고, 너무 짧게 했더니 천을 내린 의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다 떨어뜨리면서 장막이 걷히는 느낌으로 연출했다가 현장에 와서는 내려오는 높이를 조절했다. 이 안에서 구현된 것도 많았다. 저희의 상상을 구현해 내려고 많은 분들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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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과 한겨레(2016~2023)에서 매주 문화예술 소식을 전하는 객원필진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대학로에서 공연과 전시를 보며 현장을 담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