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밥 딜런의 새로운 전기영화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가 기발한 방식으로 이 현대의 호메로스, 부활한 셰익스피어를 재현했을 때 과연 누가 다시 도전할까 궁금했다. 물론 이 대중음악의 전설을 다룬 기록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의 <노 디렉션 홈>을 위시해 이미 여러 편이 등장했지만, 1941년생으로 지금도 현역인 이 거인의 생애를 온전히 축약한다는 건 불가능한 도전에 가깝다. 보통 난이도가 아니다.

제임스 맨골드는 이미 밥 딜런과 동시대의 또 다른 미국 대중음악 거목, 자니 캐시(그는 이번 영화에도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의 전기물 <앙코르>로 성공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아티스트의 내밀한 인생 역정과 당대 사회문화를 섬세하게 접목하는 과제에 이골이 난 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몫에 선택과 집중을 과감히 택했다. 그 결과는 밥 딜런이란 거인의 어깨에 관객이 올라타되,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그가 걸었던 흥미로운 시대의 궤적을 오롯이 체감하게 만들어 준다.

'밥 딜런 비긴즈'를 목격할 기회

 <컴플리트 언노운> 스틸
<컴플리트 언노운> 스틸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961년 봄, 미네소타 시골에서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뉴욕에 도달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단서를 찾은 그는 뉴저지의 어느 병원으로 향한다. 그 병원에는 청년이 흠모하던 음악적 우상, 포크 음악의 거장 우디 거스리가 입원해 있었다. 희귀 유전병으로 인해 음악 활동은커녕, 병상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투병 생활 중이던 그를 병문안하러 무작정 들른 것이다.

그 자리에는 또 다른 포크의 대가이자 훗날 미국 민중가요의 전설이 된 피트 시거도 있었다. 시거는 병실에서 적적한 친구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참이다. 뜻밖의 방문객을 환영한 그들은 청년이 음악을 하는지 묻고, 한 곡 청한다. 거장들 앞에서 떨려 하며 청년은 수줍게 자작곡을 공연한다.

얼마 후, 뉴욕 포크 공연장과 클럽 곳곳에서 당시 성행하던 '오픈 마이크' 시간에 그가 목격된다. 피트 시거의 격려로 무대에 선 청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목받기 시작한다. 유력 미디어의 음악평론가가 호의 가득한 추천을 남기고, 전쟁 반대와 민권운동이 세상을 뒤덮던 시절, 포크의 신성은 곧 기회를 잡는다.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앨범을 내게 된다. 그 와중에 공연은 거듭 이어진다. 시대의 격렬한 요동이 청년의 노래에 반영된다.

그의 목소리는 포크 주류와는 퍽 달랐다. 곱고 청아한 선율에 정치사회 문제를 담은 가사라는 일반적 경향 대신, 청년은 시적 가사와 문학적 표현 가득한 내용을 툭툭 내지르듯, 때로는 읊조리듯 이어 나갔다. 그는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는다. 집도 없이 여기저기 전전하며 고대 음유시인처럼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뉴욕 거리를 돌아다녔다. 작은 공연에서 연인 실비와 사귀게 된 청년은 더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실비는 그를 사랑하지만, 누구의 통제도 심지어 무슨 생각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행보에 거듭 좌절한다. 애초 그는 무엇에도 어디에도 얽매일 수 없는 영혼인 것이다.

한편, 청년은 당대 포크의 상징 중 하나인 조안 바에즈와 만난다. 음악적 동료이자 환상의 콤비로 활동하던 둘의 관계는 연인이자 동지로 가깝다가 멀어지길 반복한다. 명성과 성공을 획득한 가운데, 어느새 포크의 차세대 주역이 된 그의 음악적 행보에 많은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청년은 포크의 범주에 자신을 가두길 원치 않았다.

그는 그저 자유로운 영혼이자 마음껏 노래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행보는 오랜 동료들과 긴장을 쌓아만 간다. 마침내 당대 포크의 총본산,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청년은 훗날 대중음악 역사에 거대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거사를 감행한다. 그의 이름은 '밥 딜런'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격동의 1960년대, '구르는 돌처럼'

 <컴플리트 언노운> 스틸
<컴플리트 언노운> 스틸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는 밥 딜런이 본격적 음악 활동을 개시하는 1961년부터 현대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분기점을 이룬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공연과 3집 앨범 제작 과정까지의 순간을 뚝 떼어내 관객의 눈앞에 펼친다.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살아있는 전설의 일대기 전체를 한 편의 영화로 갈무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욕심을 절제하되 거장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고자 한 집요한 의지의 결실이기도 하다.

특정 인물의 전기영화는 대개 해당 주인공에 집중해 생애 전반을 연대기적으로 소개하거나, 발췌 형식을 취한다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내밀한 TMI 부분을 끄집어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컴플리트 언노운>의 독창적이자 탁월한 점은 그런 전형성을 탈피했다는 데 있다. 영화가 소개하는 내용은 백과사전 항목만 검색해도 대충 다 나와 있는 정보들이다. 특별히 새롭게 선보이는 지점은 거의 없는 셈이다.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덜한 편이지만, 서구 대중문화에서 밥 딜런이 점유하는 비중이 워낙 대단한 터라 본 작품 속 내용은 거의 '일반상식' 수준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영화는 밥 딜런을 주인공으로 삼긴 하되, 주인공 또한 1960년대라는 시대 배경 속에서 영향을 받는 동시에 반사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배치하는 활용법을 선보인다. 인물 간의 관계는 3+1(+1)의 구성을 취하는데, 포크 음악의 격동을 음악인 사이의 중력으로 함축하기 위해 딜런이 중심에 있다면 뿌리에는 우디 거스리, 양옆으로는 피트 시거 & 조안 바에즈 vs. 조니 캐시 구도가, 딜런의 사생활(연애사) 관련해선 그의 좌우에 각각 실비와 조안 바에즈가 자리하는 식이다. 물론 음악 활동의 긴장은 사적 감정이나 이권 다툼과 거리가 멀고, 연애사 역시 음악적 방향과 당시 시대상에 연결된다. 공과 사는 서로 밀접하게 결합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다양한 쟁점과 평가가 가득 들어차 있지만, 그 핵심에는 역시 당대에 정치적 운동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포크 음악의 대명사이자 '저항 가수'로 표상되던 주인공이 일체의 속박을 거부하고 오직 '노래하는 사람'으로 자유를 찾는 여정이 놓인다. 상황은 제법 달라도 고 김민기가 걸었던 경로와 통하는 지점이 있되 방향은 정반대로 도약한 것이라 하겠다.

그저 진정성을 담은 음악으로 대중가수가 되려 했던 김민기는 유신독재의 서슬푸른 검열 덕분에 의도한 적 없던 민중가수가 됐다. 밥 딜런은 세상을 향한 숨김 없는 시선을 노래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음악이 어떤 카테고리에 구속되길 끊임없이 거부하고자 탈주를 감행했다. 그 논란 가득한 도전이 <컴플리트 언노운>의 주요한 갈등과 긴장을 책임진다.

길 위에 선 음유시인의 초상

 <컴플리트 언노운> 스틸
<컴플리트 언노운> 스틸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가능한 넓고 높게 자신의 음악이 전해지고 공감을 얻기를 바랐던 딜런에게 좌우 대결이 격화되며 케네디 대통령과 킹 목사, 말콤 X의 죽음이 이어지던 당대 상황은 당연히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집회에 함께 하고, 거리 공연에서 입장표명에 동참했지만, 정형화된 형식에 갇히거나 특정 진영에 고정되는 건 원치 않았다.

현대의 방랑시인은 시대의 거울이자 반영이란 임무는 거부하지 않을지언정, 자유로운 영혼을 포기할 생각은 털끝도 없었다. 음악적 실험 역시 가수로서 당연한 도전이라 여겼다. 어느새 고정된 형식에 갇혀가던 포크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영화를 초월해 평생 그가 지향하며 달려온 경로다. 본 작품은 그 이정표를 제시함에 충실할 뿐이다.

당대 포크는 정갈한 어쿠스틱 기타에 의지한 반주, 지적인 가사에 힘입은 메시지 위주로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딜런의 내면에선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향한 갈망이 화산처럼 용솟음치던 참이다. 그는 존경하는 선배 우디 거스리가 영향받은 흑인 노예의 영가,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와 '골빈' 청춘들의 파티 음악으로 치부되던 로큰롤을 포크와 결합하고자 부단히 시도한다. 정치 구호를 복사해 붙인 것 같은 선동적인 가사는 작위적이라 머지않아 휘발할 것이란 확고한 판단에서다. 포크 스타일의 원형이 된 컨트리 장르에서 과감한 실험을 모색하던 자니 캐시와의 교류 또한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중단 없는 혁신을 꿈꾸던 이 '구르는 돌'과 기존 포크 진영이 정면충돌하던 1965년 뉴포트 페스티벌 현장이 영화의 카타르시스를 용암이 분출하듯 뿜어내며 다가온다. 포크의 정신을 버렸다며 분노한 선배 음악인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좌절하는 조안 바에즈의 낙담한 표정, 야유와 탄식이 교차하는 관객의 반응이 교차한다. 하지만 딜런은 확신에 차 있다. 이것이 포크의 미래이자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냉철한 판단과 구속을 거부하는 영혼의 완벽한 화학적 융합이다. 그렇게 물에서 포도주가 탄생한다. 흥분과 전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멈출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찰나다.

과연 밥 딜런은 대중에 영합해 평화운동의 기운이 쇠퇴하던 시대 징후를 재빨리 포착하고 처신한 것에 불과했을까? 감독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거나 저울추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뉴포트의 아수라장을 뒤로 한 채 도입부에서 그가 했던 바대로, 다시 우디 거스리가 투병하던 병원으로 돌아가 작별 인사를 건넨다. 그때 존경하던 스승이 편치 않은 몸을 움직여 딜런에게 전한 제스처가 제작진의 시각일 테다. 눈을 크게 뜨고 그 역사의 분기점을 확인하길 기원하는 바다. 한국 민중가요가 몇 차례 부침을 겪으며 '다시 만난 세계'에 도달한 현실을 대입해도 무척 흥미로울 대목이다.

다 보고 나면, 누군가는 밥 딜런 평전을 주문할 테고, 누군가는 영화의 OST나 밥 딜런의 음원을 저장할 것이다. 역사의 현장을 배경으로 들려오는 명곡들, 전설적 공연의 찰나가 화면을 채울 때마다 침 꿀꺽 삼키며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의 거장으로 '빙의'하다시피 한 티모시 살라메와 모니카 바바로, 에드워드 노튼의 노래 솜씨에 탄복하며, 위대한 예술이 어떤 배경과 변화를 통하며 탄생하는지 목도할 드문 기회다. 다시 밥 딜런을 들어야 할 시간이 왔다. 바로 그 임무를 위해 만든 영화다.

<작품정보>

컴플리트 언노운
A Complete Unknown
2024|미국|전기, 드라마, 음악
2025.02.26. 개봉|141분|12세 관람가
감독 제임스 맨골드
출연 티모시 샬라메, 엘 패닝, 모니카 바바로. 에드워드 노튼 외
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컴플리트 언노운> 포스터
<컴플리트 언노운> 포스터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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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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