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 아까운 배우가 세상을 떴다. 스물다섯 김새론이 16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단 소식이다. 2022년 음주운전으로 벌금형을 받고 활동을 중단한 지 4년만, 몇 차례 복귀 시도가 좌절된 뒤 신작 독립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한때 김새론은 한국영화계 전체가 주목하는 배우였다. 그녀가 스타가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2009년 우니 르콩트의 <여행자>로 인상적인 출발을 한 김새론이다. 해외입양아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어린 나이에도 섬세하게 연기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0년, 그녀는 출세작 <아저씨>와 만난다. 그녀의 나이 고작 10살 때였다.
<아저씨>는 걸출한 작품이다. 감독 이정범과 주연배우 원빈·김새론 모두에게 <아저씨>는 특별한 영화가 됐다. 이정범에겐 한국 액션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가, 원빈에겐 데뷔 십수 년 만에 비로소 원톱배우로서의 역량을 확인케 했다는 극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김새론이 없었다면 영화는 결코 지금과 같은 작품이 되지 못했을 테다.
흔하고 익숙한 이야기를 특별하게 한 것
▲영화 <아저씨>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김새론이 연기한 소미는 영화의 동력을 제공하는 캐릭터다. 소미는 스트립댄서인 엄마 박효정(김효서 분)과 단둘이 낙후된 동네에서 산다. 말이 엄마지 마약에 절어 되는대로 살아가는 그녀가 제 딸을 정성 들여 돌볼 리 없다. 방치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외톨이로 지내는 소미의 곁에 그나마 있는 존재가 바로 차태식(원빈 분)이다. 전당포를 운영하며 바깥 세상엔 나가지 않는 이 외로운 사내에게 그만큼이나 외로운 소미는 동질감을 느낀 듯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효정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다. 효정과 소미가 장기 밀매에 마약 유통까지 손대는 범죄조직에 납치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태식이 소미를 구하기 위해 조직을 역으로 추적하기 시작하니, 그것이 영화 <아저씨>의 얼개가 된다.
범죄 조직의 타깃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러 전직 특수부대원인 태식이 나선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감상을 일으킨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슷한 구조의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간단히 떠오르는 것 만도 <레옹>부터 <맨 온 파이어>·<테이큰>·<더 이퀼라이저> 등 여럿이다.
뤽 베송의 1995년 작 <레옹>은 청부살해를 업으로 삼는 킬러 레옹(장 르노 분)이 범죄조직으로부터 옆집 소녀 마틸다(나탈리 포트먼 분)를 지키는 이야기다. 2004년 작 <맨 온 파이어>는 당대 최고의 아역배우 다코타 패닝의 주연한 작품으로, 전직 특수요원(덴젤 워싱턴 분)이 저와 우정을 튼 소녀를 유괴한 범죄조직을 박살 내는 작품이다.
2008년 나온 <테이큰> 또한 비슷한 구성을 가졌다. 전직 특수요원 브라이언 밀스(리암 니슨 분)가 여행지에서 납치된 딸을 구하러 유럽 범죄조직을 역추적하는 것이다. 아예 '서양판 아저씨'란 평가가 나오기도 했던 <더 이퀼라이저>는 특수요원(덴젤 워싱턴 분)이 어린 콜걸(클로이 모레츠 분)에 해를 입힌 범죄조직에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물론 <더 이퀼라이저>의 원작인 동명 TV 시리즈가 <아저씨>보다 훨씬 앞선 1984년에 제작되긴 했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아저씨>는 그 틀에선 새로운 영화가 아니다.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직 요원이 저와 유대를 가진 아이를 위해 범죄조직에 맞선다는 구성은 흔하디흔해 새로움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아저씨>는 한국 액션영화의 새 장을 연 매력적인 작품이라 평가되니, 그건 작품이 그저 아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의 특별함을 빚은 덕이겠다.
잊기 어려운 10살 소녀의 연기
▲영화 <아저씨>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액션연출에 정평이 난 이정범의 재주와 원빈의 인상적인 연기가 물론 <아저씨>의 특별함을 이룬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김새론의 존재다. <레옹>의 나탈리 포트먼, <맨 온 파이어>의 다코타 패닝, <더 이퀼라이저>의 클로이 모레츠의 공통점은 성인이 돼서도 연기력을 인정받을 만큼 실력 있는 배우들이었다는 점이다.
<아저씨> 또한 마찬가지다. 이 영화 속 김새론의 연기는 위에 언급한 명작들과 견주어서도 그리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레옹>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표현의 섬세함과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위면 위지 아래가 아니다. 비슷한 구성을 가진 작품들, 심지어 더 명성 높은 배우들과 비교해도 인정할 만한 모습을 보였다.
영화 속 소미는 납치 및 장기 밀매 범죄의 피해자이며 주인공 차태식과 미묘한 관계성을 드러내는 인상적인 인물로 기능한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소녀이며, 범죄피해자로 두려움에 떠는 아이이기도 하고, 아픔을 가진 차태식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음에도 김새론은 약간의 논란조차 없는 훌륭한 연기를 펼쳐 <아저씨>의 흥행에 힘을 실었다.
10살을 전후해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들을 연달아 만난 배우는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서도 그리 많지가 않다. 심지어 몰입도 있는 내면연기부터 장르영화에서의 적절한 캐릭터 연기까지를 자연스레 소화해 낸 배우는 드물다. <여행자>와 <아저씨> 이후 김새론에게 러브콜이 쏟아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몇몇 아쉬운 작품들을 제외하고 2012년 <이웃사람>, 2013년 <만신>, 2014년 <도희야>, 2017년 <동네사람들>에 이르는 필모그래피는 흥행과 작품성 모두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아들었다. 꾸준하고 활발한 활동에다 제법 괜찮은 선구안까지 갖춘 실력 있는 배우의 등장은 새 얼굴이 갈급했던 한국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안타까운 인사
▲영화 <아저씨>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일찌감치 거둔 기록할 만한 성취는, 그러나 김새론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영화계에서의 성공 뒤 여러 드라마에서 주연급으로 기용되며 성년을 맞이한 김새론이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이던 그녀가 2022년 자기 운명을 좌우한 일대 사건을 일으킨다. 다름 아닌 음주운전이었다. 성년이 된 뒤 이렇다 할 성공작을 내지 못한 탓으로 아직 그녀를 아역배우로 기억하는 이가 많던 터였다. 그래서 충격이 더욱 컸을 테다. 음주운전을 하고 사고를 낸 뒤 도주하다 적발된 그녀는 단박에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음주운전 사건 뒤 복귀 시도가 있었다. 생활고를 호소하며 아르바이트하고 지낸다는 근황을 알리자 심각한 수준의 비난 세례가 이어졌다. 예정됐던 연극 출연은 불발됐다. 고작 이십 대 초반 어린 배우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들이 가뜩이나 예민한 감수성을 얼마나 헤집어놓았을지 짐작할 만하다. 악의적인 비방과 모욕을 삼가달라는 소속사의 요청은 매번 무시됐다. 전 국민적 비난에 노출됐다 세상을 떠난 연예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음에도 자제하는 움직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아저씨>의 끝에선 죽었다 여겼던 소미가 태식의 앞에 나타난다. 태식은 소미를 구했고, 그 대가로 그녀를 떠나야 했다. 더는 그녀를 지킬 수 없는 태식이 소미에게 혼자 설 것을 당부한다. 세상은 잔혹하고 나쁜 말들이 아무렇게나 떠도는 가운데 어린 영혼의 안녕을 누구도 당부할 수 없는 채로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이례적 영웅 태식이 사라진 한국 사회가 소녀를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이 <아저씨>의 진짜 결말이다. 문방구를 나서면 더는 소미의 곁에 머무를 수 없는 태식, 주변의 누구도 없는 10살 소녀에게 "혼자 서는 거야"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이 영화의 끝맛을 씁쓸하게 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소녀가 지켜지지 못했음을 안다. 영화 안에서도, 그리고 밖에서도. 짧지만 환하게 빛났던 배우 김새론의 명복을 빈다.
▲영화 <아저씨> 포스터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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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지켜내지 못한 소녀... 배우 김새론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