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갈무리
KBS1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갈무리KBS1

지난 13일 방영된 KBS1 <다큐 인사이트>는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해장국'이라는 음식을 매개로 밤을 지새워 일을 하는 대도시의 노동 현장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간 삼겹살, 소주, 짜장면 등 친근한 음식을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 봐왔던 KBS1의 음식 다큐가 그 궤도를 조금 틀어, 음식 너머 사람들의 삶으로 시선을 넓혀간 것이다.

<해장 : 대도시의 생존법>의 프레젠터는 진선규, 그가 늦은 밤 촬영을 마치고 24시 해장국 집의 문을 열며 다큐는 시작된다.

밤새도록 손님이 몰리는 해장국집

531 vs. 2158

이 숫자가 의미하는 건 바로 밤을 새워 장사를 하는 24시간 식당의 수이다. 531곳은 부산 지역이고, 그보다 거의 네 배에 가까운 2158곳 바로 서울의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의 수다.

전국의 일자리 중 절반이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다니, 따지고 들자면 많은 숫자도 아니지만 2000곳이 넘는 식당에 밤새도록 손님이 몰리는 우리의 현실 상황이 새삼스럽다.

오후 10시, 뼈다귀 해장국 집. 미장공 이장남씨는 그제서야 늦은 저녁 한 술을 뜬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강남의 신축 공사장, 바닥을 평평하게 하는 일인 미장을 담당하는 그는 바닥이 마르는 동안 잠시 짬을 내 저녁을 먹으러 왔다. 지난 20년간 대부분 밤에 일했다는 이장남씨의 지친 허기를 때워준 것은 바로 밤을 새워 문을 여는 해장국집이었다.

 KBS1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갈무리
KBS1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갈무리KBS1

밤을 세워 작업을 하는 공사장뿐이 아니다.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도 밤이 깊을 수록 살아난다. 오후 9시 해남에서 배추를 싣고 도착한 트럭. 중도매인 박형규씨의 일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후 8시에 출근해 다음 날 오전 10시 퇴근한다. 그렇게 지난 30년간 밤을 새며 가락시장을 지켰다.

7500원짜리 배추를 8천 원에 낙찰했다며 찰나의 희비가 오가는 경매가 불과 30여 분 만에 끝나고, 긴장감과 허기를 달래러 삼삼오오 사람들이 가락시장 내 포장마차로 향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칼칼한 국물에 몸을 누인 동태, 가곡 '명태'처럼 시인의 시는 되지 못하더라도 긴 밤을 지새운 생업의 열기를 식혀주기에는 손색이 없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며 기꺼이 가락시장에 젊음을 묻은 22살 청년의 선택은 부대찌개이다. 밤새워 일하는 이들이 많은 이곳에서는 음식을 담은 냄비에 휴대용 버너까지 겸비한 '찾아오는 배달 서비스'가 성황 중이다.

새벽 2시, 심야 버스는 밤 거리를 누빈다. 대리운전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중이라는 류성선씨는 이 시간에 버스를 타는 이들 중 상당수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덧붙인다.

0시에서 새벽 4시까지 시간에 심야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만 34만2천 여 명, 새벽 3시까지 운행하던 심야 버스가 새벽 5시로 운행 시간을 늘렸다. 심야 전용 버스도 운행을 확대했다. 새벽 4시를 넘으니 '미화'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타기 시작한다. 몸만 사리지 않는다면 해볼 만한 일이라는 어르신, 그래도 내 자리가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미소를 띠신다.

종로로 넘어오니, 3천 원짜리 해장국집은 불야성이다. 햇수로 52년 째, 메뉴는 단 하나. 두부가 쑹덩쑹덩 들어간 우거지해장국에 쌀밥, 깍두기. 자재를 싣고 자신의 일터가 있는 안산까지 가야 한다는 작은 공업사 사장님은 밥을 훌훌 말아 한 그릇 뚝딱 끝낸다. 20년째 단골이라는 택시 기사는 12시간의 하루를 이곳에서 시작하신다고. 새벽 6시 쯤만 열어도 편하련만, 이른 새벽부터 해장국 한 그릇으로 속을 녹이며 일터를 찾는 이들 때문에 50년을 넘게 새벽 4시부터 가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노동의 동반자

 KBS1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갈무리
KBS1 <다큐 인사이트> 방송화면 갈무리KBS1

'술로 쓰린 창자를 푼다'라는 뜻의 한자는 '해정'(解酊)이다. 그런데 이 '해정'의 한자어가 훗날 '해장국'이 됐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며 찾아든 외국인들, 이들은 주로 쇠고기의 안심·등심 등 주요 부분을 많이 먹었고, 내장, 잡고기, 뼈 등이 남게 됐다.

주변 식당에서 이것을 이용해 국을 끓였는데, 노동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술 마신 다음 날 숙취 해소에 최고여서 해장국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일찍이 귀한 단백질을 여럿이 나누어 먹기 위해 '탕'이 고유한 음식으로 자리잡은 우리네 음식 문화에서, 해장국 한 그릇은 탕 문화의 산업사회적 진화인 셈이다.

경제 개발과 함께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들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 빨리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든 음식 중에 해장국만한 게 있을까. 도축장 근처에서는 싱싱한 선지, 돼지 잡뼈, 등뼈, 양선지 등 고기 부속물 등과 채소들이 어우러져 한 그릇의 해장국으로 탄생됐다. 지역에서 인기를 끌던 콩나물도, 복국, 북엇국도 지역민들과 함께 상경했다. 고된 노동을 달래주던 한 잔의 술과 함께, 동반자처럼 허한 속을 풀어주던 한 그릇의 해장국이야말로 노동 현장의 오랜 동반자다.

IT기업에 다니는 최상률씨는 어제 회식의 숙취를 해장국 한 그릇으로 풀며 오늘의 회식에 만전을 기한다. 이처럼 노동주의 후일담으로, 혹은 또 새로운 노동주의 파트너로 해장국은 그 위상을 드높여 왔다. 하지만 해장국이 숙취해소제로만 자리매김하는 건 한정적이다. 경남 창원에서 올라온 골절 환자까지, 오늘 하루 3번째 수술을 마친 정형외과 의사 김형년씨의 쌓인 피로를 푸는 것 역시 해장국이니 말이다.

과로와 과음이 뒤엉켜 버린 영등포 거리의 밤을 지키는 경찰들이 12시간 만에 먹는 첫 끼는 따뜻한 라면 국물이다. 24시 무인 라면 가게, 이제 라면은 어엿한 해장국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도시의 밤이 편리해질 수록 누군가의 밤은 그 도시를 밝히는 노동으로 채워져 간다.

남구로 역에 몰려 도시의 새벽을 깨우는 1000 명에 가까운 이들, 전국 어디라도 좋다지만 이들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이 일자리를 못 구하고 돌아서야 한다. 오늘도 허탕친 박요남씨는 현장의 짬빱치고는 짧다는 20년 경력이다. 목포에서 장거리 화물을 하다, IMF로 그만두고 노동일을 배웠다는데, 이제 경기가 안 좋아 그마저도 내일을 모르는 처지다. 그들이 모여든 순댓국집, 오늘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들에게는 만 원짜리 순대국 한 그릇의 선택이 얼마나 고민됐을까.

다큐는 밤을 세워 문을 여는 해장국집과 사람들이 즐겨 먹는 해장국을 통해 밤을 세워 일하는 이 시대 노동 현장을 탐사한다. 평범했을 뻔한 다큐는 그들이 뜨는 해장국 한 숟가락이 더해지며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로 변모한다. 그리고 선지, 순대, 뼈, 콩나물 등 해장국의 종류 만큼이나 다양하게, 수많은 인간 군상이 도시의 밤을 자신의 낮으로 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전달해 주고 있다.
다큐인사이트 해장 대도시의생존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