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리남> 스틸컷
영화 <수리남> 스틸컷넷플릭스

야구공. 그건 그저 작은 물건이다. 야구경기에서 치고 던지고 받는 것, 경기에 필요한 작은 도구다. 경기장에선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야구장을 벗어나면 공은 그저 기념품이 된다. 유명 선수의 사인이 있는 것은 가치 있는 사인볼이 되고, 없는 것은 경기나 연습에 쓰일 뿐이다. 공으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은 야구공 하나가 해낼 수 있는 특별함을 보인다. 남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수리남에서 마약 코카인을 유통하는 국제범죄자 조봉행 검거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야구공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는 흔치 않은 드라마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2000년대 후반이다. 1968년생 사내 강인구(하정우 분)는 슬하에 아들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다. 평생을 일만 했으나 끝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부모는 세상을 일찍 저버렸다. 아직 어린 동생 둘을 돌보며 온갖 잡일을 마다않던 그는 결혼한 지 수년이 흘러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정도가 된다. 동생들을 독립시키고 작은 전셋집이지만 아파트로 옮겨온 그다. 작지만 꾸준히 수입이 나는 사업체까지 운영하며 그럭저럭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아간다.

죽도록 일해도 가난한 보통의 인간

하지만 그에겐 적잖은 불안이 있다. 평생 죽도록 일해도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불안이다. 아들딸이 크기까지 남은 시간이 한참인데, 그때까지 꾸준히 수입을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수시로 고개를 치켜든다. 평생 일만 하다 일터에서 죽은 부모의 모습은 저의 미래 또한 얼마 다르지 않으리란 비관을 싹트게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단 판단은 결국 그가 삶의 방향타를 완전히 반대쪽으로 틀어버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인구는 우연히 제 삶을 바꿀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원양어선 선원으로 일했던 동창이 찾아와 수리남에서 홍어를 들여와 한국에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그는 그대로 가진 돈 수억 원을 몽땅 털어 넣어 수리남에서 수산물 유통업체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한다. 그게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다.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테다. 법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만큼 타국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을 떠나 저 멀리 수리남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건 매순간 역경과 마주하는 일이다. 어느 날은 군인이 보호비를 뜯으러 오고, 다른 날은 지역 깡패가 상납을 요구한다. 여기저기서 요구하는 돈을 맞추려면 사업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망할 것이 자명하다. 전 재산을 들여 시작한 사업체가 한 순간에 날아갈 위기에 처하니 인구의 마음이 말이 아니다.

수리남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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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6부작으로 제작된 <수리남>은 인구가 수리남에 있는 교회에 나가 전요환 목사(황정민 분)와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조봉행을 모델로 한 전요환은 겉으로는 목사이지만 실상은 수리남 내의 탄탄한 인맥과 사업수완을 바탕으로 코카인을 유통하는 마약조직의 두목이다. 종교와 마약, 인맥과 수완을 활용해 사병까지 부리며 일대를 장악한 전요환은 수리남 대통령까지 등에 업고 명실상부 수리남 최대조직의 두목으로 활개를 친다.

이야기는 전요환을 검거하려는 한국 국가정보원의 작전에 인구가 합류하며 급물살을 탄다. 마약 거래를 빌미로 전요환에게 접촉해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인구와 외부에서 그를 지원하는 국정원, 그 가운데 겪는 위기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수리남>이 가진 내세울 만한 장점은 역시 캐릭터다. 황정민이 연기한 전요환은 물론이고, 그 심복격인 변기태(조우진 분), 데이빗 박(유연석 분), 이상준(강빈 분), 갈라스(쉬디 아주포 분)까지가 모두 선명하고 입체적이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고 겹치지 않는 이들의 존재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작품을 보는 맛을 더한다.

그러나 전요환은 이토록 색깔 강한 이들을 완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강한 색깔만큼이나 단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인 변기태는 같은 한국인이 아니어서, 데이빗 박은 유연하긴 할지언정 배포가 크지 못해서, 이상준은 너무 자기를 맹신해서, 갈라스는 그저 경호실장일 뿐이고 사업을 같이 할 존재가 아니어서 그렇다.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업파트너가 간절한 전요환의 눈에 수완 좋은 강인구가 드는 건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호감과 불신, 미묘한 관계의 긴장감

<수리남>은 전요환과 강인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 호감과 불신이 엇갈리는 독특한 관계를 통해 긴장감을 자아낸다. 보는 이는 국정원과 함께 전요환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 인구의 사연을 알고 있지만, 그가 전요환과 함께 하는 동안 다른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인지를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작품 가운데 전요환이 인구에게 보내는 특별한 신뢰가 이따금 모양을 드러내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대가로 제안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가 유혹을 느낄 수 있는 여지도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야구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제 역할을 수행한다. 어느 날인가. 마약거래를 위해 브라질 국경까지 이동하는 강인구에게 전요환이 야구공 하나를 건네는 것이다. 야구공엔 한때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영웅이었던 박찬호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 전요환은 이 야구공이 자기에게 무척 소중한 것이라며 그걸 갖고 있는 동안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다고 말한다.

작품 가운데는 야구공뿐 아니라 박지성의 사인볼이며 유니폼, 온갖 특별한 기념품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로비용으로 사업 파트너며 정관계 인사들에게 선물하는 기념품으로 쓰이는 것인데, 모두 조잡한 가품이라는 게 특징이다. 드라마는 그를 우스꽝스럽게 내보이는데, 박지성 사인 유니폼을 보고 공에다가 비슷하게 사인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 뒤 그를 선물하는 장면을 이어붙이는 식이다.

수리남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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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은 그 결말에 이르러, 즉 실화와 마찬가지로 전요환 일당을 일망타진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과 상봉한 강인구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강인구가 운영하는 카센터로 그와 함께 작전을 하며 우정을 쌓은 국정원 간부가 찾아오는 장면인데, 그는 강인구에게 '전요환을 찾아 면회를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전요환이 강인구에게 꼭 받아야 할 물건이 있다 했다고 전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야구공이다. 전요환이 말하길, 자신이 가진 다른 물건은 죄다 가짜였으나 야구공만큼은 진짜였다는 이야기다. 놀란 강인구가 자기 앞에서 동생과 공을 주고받는 아들을 불러 그 공을 확인하니, 거기엔 가짜로 여겼던 박찬호의 사인이 떡하니 들어가 있다.

자신이 가졌던 다른 모든 물건들이 가품이었으나 야구공만큼은 진품이었다는 사실, 그건 전요환이 강인구에게 진실로 마음을 주었다는 증거다. 제 심복 가운데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은 진짜를 그는 강인구에게 주었던 것이다. 강인구조차 알지 못했던 사이에. 그리고 돌아보면 그는 다른 이들에게 베푼 적 없는 친절을, 또 진심을 그에게만큼은 전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에는 확신할 수 없었던 진심이 그렇게 그로부터 강인구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야구공에 적힌 사인이 진짜였다는 사실은 그대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전과는 달리 보도록 한다. 이미 해소되고 해결된 이야기는 그렇게 사후적으로 전과 다른 무게를 갖는다. 고작 야구공 하나가 해내는 일이 이처럼 특별하다. <수리남>은 소품이 작품을 어떻게 달리 보도록 하는지를, 소품을 적절히 활용하는 일이 이야기를 얼마나 깊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효과를 일으키는 이 같은 장치로부터 관객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특별한 감흥을 맛보게 된다.

 영화 <수리남> 포스터
영화 <수리남> 포스터넷플릭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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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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