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한 영상을 보았다. 붉은 옷을 입은 청년들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한 여성이 마이크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영상이었다. "안녕, 안녕, 안녕하십니까! 민족 고대! 호안 정대!"하는 외침 뒤 제 학번과 이름까지를 시원하게 소개하는 모습이었다. 패기 넘치는 목소리와 뒤따른 학생들의 뜨거운 호응은 젊은이의 혈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실감케 했다.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이건 FM구호, 한국 대학생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자기소개 방식이다. 고려대학교 앞에는 민족, 연세는 통일, 자주경희, 애국한양, 청년서강, 민족성대, 의혈중앙, 민중시대, 단결홍익 등 학교마다 저마다의 구호를 붙여 저를 소개한다. 군대에서 쓰이는 'Field Manual'의 약자를 구호 앞에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는 각 학교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사회가 조직화되었던 시절의 유산이다.'학생사회가 공식, 또 비공식 조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던 시절, 다시 말해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학생운동기의 유산이다.

민족과 통일, 자주와 애국, 청년과 민족, 의혈과 민중, 단결 등의 구호는 각 학교 학생들이 표방하고 숭상하는 정신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FM구호 아래 과거의 정신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떠올리면 절로 민망해지지 않을 수 없다. 통일을 외치지만 통일을 꿈꾸지 않고, 민중을 말하지만 민중과는 동떨어진 삶을 사는 오늘의 청년들이 축제 가운데 초청된 연예인들 앞에서 재미 삼아 구호를 외칠 뿐 아닌가.

학생들이 시대의 중심에 섰던 시절

 영화 <정돌이> 스틸컷
영화 <정돌이> 스틸컷인디라인

각 학교 학생회가 위기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투표율 저조로 학생회를 구성하기도 쉽지 않고, 대학교 울타리 바깥의 문제에 의견을 드러내는 학생회는 비토당하기 일쑤다. 의제를 발굴하고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필수적인 조직은 학생사회에서 금기처럼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제 목소리를 내는 학생사회의 영향력은 그 수명을 다했다 해도 틀리지 않은 듯하다.

학생회, 또 학생사회가 한국사회의 일익으로 역할을 다하던 때가 있다. 1980년대는 그 절정기라 해도 틀리지 않다.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연 주역들 또한 바로 그들이다. 오늘의 체제는 학생사회의 수고와 희생 위에 세워졌다 해도 틀리지 않다. 한국 교육과 역사는 제9차 개헌으로 이뤄진 6공화국 체제가 1987년 6월 항쟁의 자랑스러운 결과물이라 말한다. 충분치 않지만 틀리지 않은 설명이다.

다큐멘터리 <정돌이>가 다루는 건 6월 항쟁, 그 주역이던 학생사회다. 그중에서도 학생운동권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다. 6월 항쟁을 시민사회의 승리라 포장하는 과정에서 차마 기록하지 않는 잘못들을, 쉬이 무시되곤 하는 희생의 면면들을 담고 있는 드문 영화다. 개헌에 이르렀으나 군부독재정권의 후신인 노태우 대통령 당선으로 귀결된 현실, 시대의 주역이었던 1980년대 운동권이 오늘날 대학교에서 완전히 멸종에 이른 이유가 이 영화 안에 얼마쯤 담겼다. 쉬이 무시되거나 왜곡돼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았단 점만으로도 <정돌이>는 볼 가치가 있는 다큐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키운 14살 가출소년

 영화 <정돌이> 스틸컷
영화 <정돌이> 스틸컷인디라인

영화는 제법 기발한 설정을 가졌다. 제목인 '정돌이'는 1987년 봄, 고려대학교 교정에 나타난 14살 송귀철의 별명이다. 나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니다. 경기도 연천 출신으로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무작정 상경한 뒤 고려대학교로 흘러든 소년이다. 청량리역에서 내린 무일푼의 소년이 수배 중이던 고대 운동권 학생을 만나 하루 먹을 것과 잘 곳을 얻고, 그를 따라 찾은 정경대 학생회실에 눌러앉은 이야기가 근 4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 특별한 감상을 자아낸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학교 바깥 거리가 무서웠던 소년은 학교 안팎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정경대 주위를 맴돈다. 매일 같이 보이는 소년에게 차츰 마음을 준 이들이 생겨나고 조금씩 친분까지 쌓이며 소년은 고대 정경대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된다. 정경대 소년이라 하여 정돌이란 별명을 얻었고, 형, 누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때는 1987년, 학생사회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때다. 학생회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그가 당시의 분위기에 젖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는 정돌이의 시선에서 당대 학내외 분위기를 그린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으로 대표되는 신군부의 폭압과 그에 맞서 일어선 이들의 희생과 용기, 거듭된 싸움 속에서 진화하고 분열하며 갈등하고 화합하던 학생사회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전해진다. 1987년 6월 항쟁과 12월 대선 개표부정과 관련한 구로구청 투쟁 등에선 고대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아갔던 정돌이다. 학내 활동 과정에서 우연히 장구를 접하고 고대 농악대 일원이 되어 활동하다가는 아예 그를 직업으로 삼기까지의 이야기 또한 등장한다. 정돌이란 예외적 인물을 통하여 1980년대 한국사회, 그 주요한 흐름이던 민주화운동, 그 중심에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사회를 설명하는 선택이 참신하다.

학생들과 끝나지 않은 싸움

 영화 <정돌이> 스틸컷
영화 <정돌이> 스틸컷인디라인

참신한 선택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정돌이> 속 선택이 꼭 그러하다. 고작 중학생 쯤의 나이로, 민주화운동이며 학생사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깊이가 없던 정돌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 또한 한계가 있어, 영화는 깊어질수록 정돌이의 삶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영화의 얼마쯤은 정돌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야기가 되고, 또 그만큼의 이야기는 그 시선 바깥에서 불러와야 하는 것이다. 그 둘 사이의 부조화가 장편 다큐로 <정돌이>가 드러내는 어색함이고 어긋남의 원인이 된다.

그럼에도 정돌이의 시선 바깥에서 불러온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이를테면 한국사회와 역사, 교육이 기록하고 전파하는 민주화운동 이야기에선 소외되어 온 진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탓이다. 이를테면 영화 가운데 당시 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사실들이다. 학생운동을 하다 퇴학당하고 끝내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들이 어떤 삶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그들이 제 인생 전부를 바꾼 당시의 경험들과 이후의 삶을 지나쳐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를 영화는 차근히 드러낸다.

누구처럼 유명한 정치인이며 대단한 인물이 되지 못한 사람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터전에서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 이 영화 가운데 제 모습을 드러낸다. 학교를 나와 구두닦이를 하고, 공장에서 평생토록 노동자로 살며 노동운동을 하고, 시골로 돌아가 직접 농사를 짓고 생태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은 적이 과연 있는가를 이 영화는 생각토록 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제 선택의 결과를 평생에 걸쳐 감내해야 했던 이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정돌이>는 진지하게 묻고 귀기울여 듣는다.

존중받아 마땅한 이야기

한편으로 학생운동권의 분열과 기회의 상실, 시민들을 실망케 한 그릇된 결정들과 그들 자신마저 지치게 한 어지러운 싸움들, 반성하고 반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비교적 솔직하게 풀려나온다. 저들이 잘한 것만큼 잘하지 않은 것을 꺼내어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정돌이>가 받아야 할 것이 바로 그러한 존중이라고 나는 적고 싶다.

1987년 6월은 절반의, 어쩌면 그보다도 못한 승리일지 모른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된 개헌의 결과로써 한국은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뽑았다. 민주화운동의 주역이던 학생운동권 또한 급속히 그 세를 잃어버렸다. 민중의 지지와 응원과 호감을, 심지어는 학생사회 내의 그것조차도 말이다.

과거의 성취를 무작정 부풀리는 것도, 실패를 과장하고 비관하는 것도 모두 옳지 못한 태도다. <정돌이>는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한국 사회가 지난 시간 동안 놓친 것이 있음을 내보인다. 나는 그것이 한국사회에 유효하다 여긴다.

 영화 <정돌이> 포스터
영화 <정돌이> 포스터인디라인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돌이 인디라인 김대현 송귀철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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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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