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미션 있는 영화는 간만이었다. 인터미션 포함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35분에 달했다.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코앞으로 다가온 아카데미 시상식 최대 화제작으로 떠오른 <브루탈리스트> 이야기다.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길 즐기는 나다. '브루탈리스트'란 제목을 보고서 떠오른 건 '잔혹한(brutal)' 이미지들의 향연이 있으리란 기대였다. 자극적인 것들이 넘치는 이 시대에 제목부터 그를 천명하는 작품은 대체 어떤 작품일 것인가. 나는 어마어마한 악당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조커> 류의 영화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런 연기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애드리언 브로디가 주연이라니, 대배우의 변신을 마주하리란 기대감도 마음 한켠을 뜨끈하게 데웠다.

물론 이야기는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더니즘 이후 나온 브루탈리즘이란 건축양식이 있고, 그를 추구하는 일련의 건축가를 브루탈리스트라 한다는 얘기를 나는 영화를 보고난 뒤 가진 어느 식사자리에서 접했다. 찾아보니 브루탈리즘이란 당시로선 나름 신재료였던 콘크리트를 적극 활용해 지은 건조하고 삭막한, 달리 보면 단순하고 효율적인 건축 양식이라 했다.

건조하고 삭막해 장식 하나 두지 않는 건물에서 도리어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단 게 색다른 감상을 일으킨다. 가만 보면 과연 그러하다. 아름다움이란 보는 이의 삶과 태도, 시야와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 아닌가. 황량한 마음을 가진 이와 번잡한 삶을 사는 이가 같은 건물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듯이.

유대계 건축가의 미국 이주기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유대계 건축가의 미국 이주기가 영화의 중심축이다. 주지하다시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필두로, 체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등 중부유럽 제국가를 포괄하는 결코 작지 않은 제국이었다. 서로 다른 민족의 대타협으로부터 출발한 이 제국은 소위 '벨 에포크'라 불리는 100년 평화의 중심에서 탄생해 20세기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말하자면 다름과 분별이 아닌 외교와 타협의 산물로 구성된 공동체였단 이야기다.

제국의 끝은 참혹했다. 인류도, 기술도, 문명도, 사상도 끝없이 확장되고 진보하리란 기대는 소위 세계대전이라 불린 일대 사건 가운데 와장창 깨어졌다. 첫 번째 대전이 낳은 전후세계의 질서와 그 모순 가운데 태어난 나치즘과 파시즘이 또 한 번의 파국을 예고했다. 서로 다른 민족성과 전통, 역사성을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분열하고 침몰했다. 제국 중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는 나치즘이 발흥한 독일의 병합대상이, 다른 지역은 점령의 대상이 됐다. 상당수를 차지한 일대 유대인에게 끔찍한 시기가 열렸음은 물론이다.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꽤나 잘 나가던 건축가다. 부다페스트 중앙도서관을 비롯, 랜드마크라 할 만한 일대 건물 여럿을 설계했을 만큼 주목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그가 미국으로 건너와 막노동을 전전하는 등 밑바닥 생활을 한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 나아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새로운 땅으로 도망쳐온 결과다.

아내와 조카와도 떨어져서 홀로 탈출한 그는 낯선 땅에서 자리잡기 위해 말로 다 못할 고난을 겪고 있다. 먼저 건너와 필라델피아에 자리 잡은 친척의 가구점 창고에 잠시 얹혀살기도 했으나 관계가 틀어져 거리를 전전한 지가 벌써 한참이다.

영화는 라즐로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일대 부자 해리슨(가이 피어스 분)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해리슨은 남다른 추진력과 배포로 사업을 일으킨 입지전적 인물이다. 불같은 성격으로 라즐로와의 첫만남부터 심한 무례를 범했으나 그 실력과 경력을 알아본 뒤 직접 찾아와 관계를 바로잡을 만큼 거침이 없다. 남다른 자질을 지녔으나 삶의 밑바닥까지 내몰린 건축가와 특별함을 이루려 드는 성공한 사업가의 만남, 그는 필연적으로 서로의 공력이 깃든 일대 사업으로 이어진다. 지역사회의 중심이 될 복합문화공간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브루탈리스트>는 제목이 말해주듯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영화다. 가족도, 경력도, 삶마저도 모조리 잃어버린 피폐하고 황량한 삶이다. 라즐로에게 마지막 남은 불꽃이 있다면 건축에 대한 갈망일 것인데, 그 귀한 기회가 그의 삶에 기적처럼 찾아든다. 자본과 인맥이 없다면 감히 할 수 없는 대규모 건축의 기회가 돈도 끈도 없는 그에게 주어졌으니 기적이라 해도 과하지는 않을 테다.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기회 앞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는 라즐로의 모습은 좁은 구멍을 통과해 집어든 열매 때문에 사냥꾼에게 붙들리고 마는 원숭이를 연상케 한다.

영화는 보는 각도에 따라 훌륭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대배우란 말이 꼭 들어맞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20여 년 전 <피아니스트>에서, 또 십수 년 전 <디태치먼트>에서 보여준 특별함이 그대로 깃들어 있다. 그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긴 작품을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명품연기를 보여준다.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이어 오스카의 주인공이 될 것이란 평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건축이라는 소재가 그 자체로 영화의 주역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작품의 특별함이다. 라즐로가 겪었고, 또 겪어나가는 온갖 고난을 이 영화는 남달리 바라본다. 통상의 유태인이 겪은 피해, 또 이민자가 겪는 어려움을 다룬 작품들과 달리 <브루탈리스트>는 건축가의 좌절된 예술혼을 충족되지 못하는 일상적 욕구며 단절된 관계 못잖게 주목한다. 그로부터 그와 해리슨의 열망과 욕망들을 드라마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훌륭한 전반부, 그리고...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인터미션을 두고 나뉘는 전반부와 후반부는 그 색채를 크게 달리한다. 전반부가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상승하려 발버둥치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라면, 후반부는 열망과 욕망이 지저분하게 엉키고 나뒹구는 너절한 이야기다. 고난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힘겨움이 전반부의 중심을 이룬다면, 뒤는 삶 가운데 난 생채기가 예술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결코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비춘다.

그저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보고팠던 이에겐 필요 이상 난잡하고 불편한 영화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때로는 쓰기 불편한 가구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브루탈리즘 양식이 대개 그러하듯.

한편으로 나는 이 영화가 잔혹한 인간, 즉 'brutalist'에 대한 것이기도 한 게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영화 속 해리슨과 그 아들이 표상하는 지극히 미국적인 인간이 라즐로와 그 가족에 미친 영향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들 밖에 없는 것이다.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 다른 인간, 그 비틀리고 저질적인 욕구가 이 시대에 얼마나 만연한가를 영화는 되돌아보도록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는 자본주의일수도, 성공에의 욕망일수도,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현대의 풍속일수도 있겠다. 그 저속함 앞에서 비틀리고 무너지는 인간, 관계, 성품들이 어디 라즐로와 그 가족의 것뿐일까.

다만 아쉬운 건 영화의 결말이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유대인, 시오니즘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2025년에 개봉에 이른 이 영화의 결말은 팔레스타인 거주지구에 대한 학살과 폭격, 또 레바논에 대한 무력도발을 그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의 현 상황을 생각해볼 때 결코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끝맺음이 아닌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성공한 건축가로서의 마지막을 회상하는 결말이 이 장대한 이야기의 결말로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건 오늘 유대와 타민족, 또 이스라엘과 주변국, 미국이 마주한 실망스런 상황 때문일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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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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