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과거로 떠났다. 그의 방패를 이어받아야 할 사람은 그와 함께 싸워왔던 팔콘 샘 윌슨(안소니 마키)이었다. 사실 스티브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로서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지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동료가 다른 의견을 내세울 때도, 혹은 정부가 자신의 신념과 충돌할 때도 스티브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에게는 슈퍼 혈청이 선사한 강인한 신체와 동료인 버키(세바스찬 스탠)와 함께 지켜 온 수많은 전장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슈퍼솔저의 힘 덕분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 자체가 일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자신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떠나며 공백이 생겼다. 누구든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는데, 바로 샘 윌슨이었다. 이미 디즈니 플러스의 시리즈 <팔콘과 윈터솔져>에서 그는 "내가 과연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도 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번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정 축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감정] 샘 윌슨의 의구심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샘 윌슨은 자신의 평범함 때문에 끊임없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슈퍼 혈청을 맞지 않은 그에게 특별한 초인적 능력은 없다. 그저 혹독한 군사훈련을 통해 단련된 군인일 뿐이기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강력함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 샘은 방패나 팔콘윙 같은 장비 없이도 여러 번 직접 싸움을 치르는데, 그 장면에서 그의 평범함이 큰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에게 "내가 정말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나"라고 반복해 묻는다. 캡틴 아메리카는 거대한 힘과 이상적인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샘이 처한 불리한 상황은 그의 '평범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관객들 역시 그를 향한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샘이 겉보기에 강력하지 않기에 관객 역시 '결국 샘이 극복할까' 하며 지켜보게 된다. 그의 평범함이야말로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드는 장치인 셈이다.
결국 영화는 샘 윌슨이 가진 '선함'과 '고집스러운 원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다고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든다. 관객들은 점차 '그가 바로 캡틴이 맞다'라는 확신하게 된다. 샘 역시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행동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샘의 평범함은 한계를 드러내는 요인이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감정] 로스의 두려움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두 번째 감정은 대통령이 된 로스(해리슨 포드)의 두려움이다. 과거 '불같은 성격'과 '군인의 기질'로 여러 혼란을 일으켰던 그는 국가 지도자가 된다. 이미지 관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통령인 그에게 캡틴 아메리카는 정치적으로 유용한 홍보 수단이다. 과거에는 히어로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통제하려고 애썼던 그가, 이제는 '캡틴 아메리카'의 명성과 상징성을 활용하려 한다.
이번 영화에서 로스는 아픈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극심한 통증이 있어 약을 먹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는 그의 변모를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로스의 진짜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임기 내내 강인하고 단호한 리더처럼 굴지만, 그는 사실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 새로운 무기를 찾는다. 또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을 몰래 이용해 어떤 사태를 만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이 그를 더욱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가는 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정말로 '개과천선'했는지, 아니면 끝내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빌런에 가까운 존재인지 헷갈렸다. 딸 베티(리브 타일러)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운 결정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그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의 두려움은 인간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줄타기하는 태도 때문에 정말 믿어도 되는 인물인지 헷갈린다. 그 모호함이 이번 영화에서 로스가 보여주는 가장 큰 아쉬움이자, 동시에 다음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미묘한 지점이다.
[세 번째 감정] 새뮤얼의 분노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장면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지막 감정은 메인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의 분노다. 그는 감마선 노출 부작용으로 인해 뇌가 지나치게 발달해버린 인물로 미래를 상당히 높은 확률로 예측해 낸다. 치열한 전투 능력을 갖춘 빌런이라기보다는 제모 남작처럼 지능적이고 전략적인 면모로 상대를 교란하는 인물이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세계 파괴가 아니다. '정부(혹은 로스)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한다.
새뮤얼은 직접적으로 수많은 군대를 이끌거나 스스로 물리적 대결에 뛰어드는 대신, 미군이나 우군 세력 내에 스파이·세뇌 등을 활용해 정부와 대립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영화 후반부에는 로스가 촉발시키는 '대형 분쟁'의 장면이 펼쳐진다.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은 이러한 교묘한 갈등 속에서 서서히 진가를 발휘한다. 물리적으로 샘이 '슈퍼솔저'만큼 강하지는 않아도, 정신적·도덕적 기준이 확고하다는 점이 새뮤얼의 지능적 공격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열쇠가 된다.
결국 새뮤얼의 분노는 스스로를 더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풀어내기 위해 뛰어난 두뇌를 활용한다. 하지만 샘 윌슨이 그가 예상한 경로와 다르게 움직이며 그의 계략을 하나씩 차단한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분노'와 '두뇌'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이다. 정의와 올바름을 지키는 자의 의지가 결국 지능적인 빌런의 분노를 이긴다. 새뮤얼의 이야기는 '힘'이 아닌 '정의'가 승리한다는 마블 특유의 주제 의식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장치가 된다.
무난하게 재미있는 마블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샘 윌슨'이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나는 과정에 집중한다. 슈퍼 혈청 없이 평범한 군인이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한계가 있는지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게 샘의 강점이다. 그래서일까, 전체적인 액션의 강도나 임팩트는 과거 스티브 로저스 시절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보다 다소 떨어져 보인다. 대신 팔콘윙을 활용한 빠른 공중 액션이 그 공백을 메우며, 정치적 긴장감과 첩보 요소가 강하게 녹아들어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통령이 된 로스와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들이 흥미롭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상징이 한 개인의 영웅성을 넘어, 국가적 정치적 무기로 활용되는 모습을 보면 '힘의 사용'과 '정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샘 윌슨은 이런 틈바구니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로스를 이해하려 애쓰며 필요한 순간엔 협력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샘의 '포용력'을 확인하며, 그가 리더의 자질을 갖췄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안소니 마키가 보여주는 샘 윌슨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는 스티브 로저스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다. 힘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싸움을 이어간다. 그렇기에 최근 마블 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 관객들도 이 영화가 주는 다른 매력과 새로운 시작점으로서의 의미를 즐길 수 있다.
개봉 전부터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받은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무난한 재미와 새로운 정체성'을 동시에 잡아낸 영화다. 스티브 로저스의 시리즈에 비해 파괴력이나 액션 스케일은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와 정치적 긴장감을 잘 살려냈기 때문이다.
만약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를 사랑했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에서도 낯설고 새로운 캡틴이 만들어가는 서사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이번 영화는 마블의 방대한 세계관을 잘 몰라도, 독립된 스토리로 충분히 이해하며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샘 윌슨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고민과 성장 스토리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여러 영화와 시리즈가 담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전달합니다.
브런치 스토리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어요.
제가 쓰는 영화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레빗구미 영화이야기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이 영화가 전달하는 감정과 생각을 나눠봐요. :)
'내가 캡틴 아메리카 해도 될까'... 평범한 영웅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