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먹으려고 병원 나갔다가... 시한부 그녀의 운명 같은 만남

[김성호의 씨네만세 949]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스틸컷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개체로서의 인간에게 세상이 끝나는 방식은 모두 두 가지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세상이 그 끝을 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인식하는 나라는 존재가 사멸하는 것이다. 내가 사라지든, 세상이 사라지든,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이뤄진다면 내게 있어 나 너머의 세계는 끝을 맺는다.

여기 두 가지 방식의 종말을 한꺼번에 맞이하게 된 이가 있다. 암 말기 시한부 환자로 뉴욕 호스피스 병동에 머물고 있는 사미라(루피타 뇽 분)가 바로 그녀다. 피부에 붙이는 진통제가 없으면 견뎌낼 수 없는 삶, 그마저도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삶의 끄트머리에 그녀가 서있다. 주변엔 온통 아프고 병든 이들 뿐이다. 맛난 것도, 즐길 것도, 의미 있는 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나날들.

그 폐허 속에서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사미라를 염려하는 이가 있다. 다름 아닌 호스피스 병동의 간호사다. 그가 사미라의 기분전환을 위해 특별한 제안을 한다. 병동을 나가 뉴욕 시내로 외출을 나가는 것이다. 함께 공연을 보고 피자까지 먹고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희미하나마 의욕을 보이는 사미라다. 그로부터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이 본격 막을 올린다.

영리한 시리즈의 스핀오프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은 할리우드 저예산 스릴러의 대표적 성공례인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2018년 첫 편이 제작된 이래 2021년 후속편이, 올해 중에 3편까지 공개가 예정된 이 시리즈는 지난해 본 시리즈 주인공 가족이 아닌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을 2024년 6월 공개했다. 같은 세계관 아래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배경과 설정을 효과적으로 재활용하겠단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영화는 그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재난의 첫째 날을 다룬다. 미국 뉴욕 중심가에서 괴생명체가 날뛰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가운데, 모처럼 시내 나들이를 나간 사미라가 겪는 하루의 이야기다. 평균 소음 90dB(데시벨)로 서울에 비해 두 배 이상 시끄러운 도시인 뉴욕이 괴생명체 등장 이후 일거에 소리 없는 침묵의 도시로 바뀐 충격적 상황을, 그 속에서 거듭 등장하는 일방적 학살을 그린다.

반려고양이를 데리고 나온 사미라. 함께 나온 간호사는 초장에 괴생명체에 끌려 사라진 상태. 그녀의 곁엔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 한 마리뿐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저처럼 떠도는 사내 에릭(조셉 퀸 분)과 만나 온갖 위기를 헤쳐 나오는 과정이 영화의 주된 줄기다.

전술했듯 사미라는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알 수 없는 여자다. 그녀에겐 당장 괴생명체로부터 살아남는 일이 중한 것이 아니다. 당혹스럽게도 그녀에겐 외출해 먹기로 약속받은 피자 한 조각이 더욱 간절하다.

영화는 이를 매우 인상적으로 연출해내는데, 영화 속 시민들이 모두 군의 알림에 따라 해안을 향해 걷는 것과 달리, 홀로 반대편 할렘가의 피자집을 향해 나아간다. 바다 건너로 피난해 다음을 꿈꾸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사미라가 꿈꾸는 건 저기 할렘가의 피자집에 있을지 모를 한 조각 피자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 곁에 있는 사내 에릭도 그녀와 같을 수는 없다. 시한부도 아니고 남은 수명이 못해도 수십 년은 될 그가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는 할렘으로 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한다. 홀로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사미라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 걷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피자 한 조각을 먹고서 그 다음을 바라보기로. 희망이 희박한 방향, 죽음만이 드리운 그곳으로 이토록 약하고 가녀린 여자를 홀로 보낼 수는 없다는 마음이 그에게는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누구도 쉽게 버리지 않는 낯선 재난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스틸컷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전에 알지 못했던 두 사람, 즉 용모며 삶의 궤적이며, 말씨와 성격으로 보아도 닮은 구석이 없는 이들 사이에 싹트는 우정, 나아가 인류애를 보여준다. 괴생명체가 지상을 휩쓸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문명의 절정에 있는 도시가 참혹하게 파괴될지라도 인간에겐 아직 고귀한 무엇이 남았음을 이 영화가 보인다. 그로부터 물리력, 또 과학기술로 상대하기 어려운 파국의 국면을 인간이 어찌어찌 대항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케 한다.

당장 며칠을 더 살지 알 수 없는 사미라다. 저의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미라를 위해 에릭은 목숨을 걸고 괴생명체가 뛰어다니는 거리로 나아간다. 사미라라고 짐만 되지 않는다. 공황장애를 앓는 에릭을 위해 사미라 또한 위험을 감수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힘을 내고 오늘의 위기를 버텨낸다.

인간의 기준에서 논해지는 강함과 약함 따위가 무용할 만큼의 힘의 격차가 도리어 약하기 짝이 없는 사미라와 에릭의 연대를 돋보이게 한다. 저 무지막지하게 강한 존재 앞에서도 인간은 이토록 작고 아름다운 무엇을 지켜낼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케 한다. 누군가는 그를 희망이라 부를 테다.

비슷한 류의 재난영화가 쉽게 비치하는 설정을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은 꺼내들지 않는다. 즉 여러 명이 무리를 짓도록 하고 그중 하나씩 낙오시켜 죽도록 하는 흔한 수법이 이 이야기 가운데는 없는 것이다. 사미라와 에릭은 물론 이들 곁을 따르는 고양이조차도 쉽게 죽거나 버려지지 않는다.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들 바깥의 이야기일 뿐 소중한 관계가 끝끝내 지켜져 나름의 결실을 맺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누군가는 이를 비현실적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가끔은 자극적 재미를 넘어 낭만이며 가치가 지켜지는 광경을 보고 싶은 법이라고 나는 그렇게 이 영화의 선택을 변호하고 싶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은 이 시리즈가 가진 특장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순도 높게 표현한 매력적인 작품이다. 오로지 극적으로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많은 이들을 등장시켜 제거해가는 데서 자극적 쾌감을 주는 흔한 재난물과 달리 장르적 매력을 영리하게 살리면서도 영화 본연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에 집중하는 선택이 도리어 낯선 즐거움을 안긴다.

스핀오프를 포함해 세 편이 나온 이 시리즈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포스터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포스터롯데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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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