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원경>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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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대주의는 태종 이방원에게서 시작됐다. 그는 명나라에 맞서 요동정벌(만주정벌)을 추진하던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전복했다. 이처럼 집권 과정부터가 친중국적이었다. 쿠데타를 두 차례나 일으켜 정통성이 취약했던 그는 명나라 황제의 책봉과 지지에 크게 의존했다. 이것이 그의 정권을 안정시킨 핵심 요인이다. 국내 정적들에게는 강했지만 명나라 앞에서는 다소 굴종적인 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그런 이방원이 명나라에 예를 표할 때 지장을 준 것이 피부병이다. 개경으로 천도한 지 5년 뒤인 1404년 5월 26일(음력 4월 18일), 명나라 사신 한첩목아(韓帖木兒) 등이 도성을 방문했다. 이날 사신단 숙소인 태평관에서 환영 연회가 열렸지만 이방원은 참석하지 못했다. 음력 4월 18일자 <태종실록>은 원인이 종기였다고 알려준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특히 중시하는 이방원이 사신단 환영연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던 것이다.
사정을 들은 한첩목아는 연회가 파한 뒤 대궐을 찾아가 이방원을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냥 돌아가야 했다. 손님을 맞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외교적 결례가 부담이 됐는지 이방원은 몇 시간 뒤 그 몸을 이끌고 태평관에 가서 사신을 만났다. 피부병 때문에 사신 접대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4년 뒤인 1408년에도 있었다.
<원경> 제10회 앞부분에는 원경왕후(차주영 분)의 처가 쪽 사람들이 이방원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종기를 악화시켜 정권을 장악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원경왕후가 "닥치거라! 내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면박을 주는 것으로 끝난다.
태종 10년 3월 17일자(1410년 4월 20일) <태종실록> 등에 따르면,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구·민무질이 왕권에 도전했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종기 문제가 거론됐다. 이방원이 '금년 들어 종기가 10번이나 났다'고 말한 1402년에 이들이 임금의 피부병 악화를 틈타 차기 왕권을 논의한 적이 있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이것이 8년 뒤에 논란이 됐던 것이다.
이방원이 피부 종기로 직무수행이 어려워지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비쳐지지 않았다면 이런 논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비쳐지지 않았다면, 왕의 피부 종기를 틈 타 다른 뜻을 품었다는 혐의가 논란거리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피부병으로 20년간 고통을 겪었다. 그 때문에 외교관계에도 지장이 생기고 권력 유지에도 빈틈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이 병을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강건한 사극 속의 이방원과 달리, 실제의 이방원은 몸의 종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에 신경을 쓰며 그로 인해 직무수행과 왕권 유지에도 영향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방원이 말타기를 좋아했던 이유
▲tvN <원경> 방송 화면 갈무리tvN
만성적인 피부 통증과 더불어 이방원의 의식과 이미지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요인은 답답증이다. 왕이 된 후의 이방원은 온종일 대궐에 갇혀 지내는 생활을 답답해했다. 위의 태종 2년 실록에 따르면 그는 의원 양홍달의 처방을 근거로 자기 몸의 종기는 구중궁궐에 갇혀 외출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했다. 즉위 이전에 비해 바깥 활동이 현저히 축소된 것이 신체의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임금의 바깥 거둥을 억제하는 신하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궐 밖을 자주 행차하면 백성들의 불편이 가중되고 민심에도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관료들은 임금의 외출을 가급적 억제했다. 이것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임금이 유학자들과의 학문 세미나인 경연(經筵)에 집중해야 유교 이념이 더욱 널리 전파될 뿐 아니라 신하들이 임금을 제어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신하들이 자신의 외출을 견제하자 이방원이 전문가의 처방을 거론했던 것이다.
이방원은 대궐의 주인이 되고자 두 차례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것도, 아버지와 형제들을 배반하면서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정작 대궐을 다 차지한 뒤에는 답답증을 잘 참지 못했다. 그런 증상을 마음속에 감추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내며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면, 신하들의 눈에 비친 이방원의 이미지에는 그런 모습도 일부를 이뤘다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항상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은 어딘가 불안정하게 보이기 쉽다. 오로지 권력에 집착하느라 부모형제도 배신하는 비정한 이방원의 모습뿐 아니라, 피부병과 답답증 등을 참지 못해 일상의 지장을 받는 이방원의 모습도 신하들의 머릿속에 입력돼 있었다고 봐야 합리적이다.
궁중 생활을 답답해하는 이방원은 툭하면 밖으로 나가 말을 달렸다. 위의 태종 2년 실록에 따르면, 최측근 조영무는 이방원이 '마음대로 달리는 것'에 대한 신하들의 우려를 전달했다. 그로 인한 사고 위험성 때문에도 신하들은 이방원의 외출을 억제했다. 이방원은 요즘으로 치면 엑셀을 꾹 밟고 시속 200킬로미터 이상의 속력을 내는 과속 운전자였다.
이방원은 몸이 야위고 허약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건국 2년 뒤인 1394년 6월 29일(음력 6.1) 이성계는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는 27세의 이방원에게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야위어서 만리 길을 탈 없이 지켜낼 수 있겠느냐?"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방원은 가냘프고 허약해 보이는 체구로 말에 올라타면 속도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바깥 공기를 좋아하던 그는 임금이 된 뒤로는 구중궁궐에 갇혀 피부 종기로 고생하고 답답증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재위기간 내내 계속되면서 직무수행과 왕권 유지에도 지장이 생겼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익숙했을 이런 이방원의 모습도 사극 속 이방원의 이미지에 추가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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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