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레> 스틸컷
영화 <벌레> 스틸컷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노동자를 둘러싼 인권과 환경 문제는 독립예술영화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주제 가운데 하나다. <천막>(2016)과 <휴가>(2021)에 이어 작년 < 3학년 2학기 >(2024)까지 끊임없이 한 자리를 바라봐 온 이란희 감독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천막 농성으로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아버지 재복이 정리해고 무효소송 최종 패소 판결 이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휴가>는 2023 인디그라운드 큐레이션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이수정 감독의 <재춘언니>(2020), 김도준 감독의 <보라보라>(2021), 정지혜 감독의 <정순>(2024) 또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 없이, 직간접적으로 노동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관련기사 : 회사에서 쫓겨난 지 5년... 그에게 딸들이 한 부탁 https://omn.kr/25l8t)

명세진 감독이 연출한 극영화 <벌레> 또한 노동자가 처한 냉혹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극의 중심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공장 노동자 하나(정이주 분)가 있다. 연로한 할머니를 부양하며 홀로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그에게 두 사람 몫의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자, 자신에게 허락된 작은 행복의 유효기간을 조금이나마 더 연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화의 초입에 등장하는 잠든 할머니 곁에 누운 하나의 평화로운 모습은 그렇게 지켜질 수 있다.

02.
"하청고용이 웬 말이냐. 불법파견 중단하라."

하나의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장은 '직접 계약직에 관한 일괄 계약해지 및 외주화'라는 내용의 공고를 게시한다. 직접 계약직 노동자 전부를 하청 계약직으로 외주화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하청으로 가더라도 근무 내용이나 월급은 동일하다며 안내하는 사측에 맞서 노조는 인건비 후려쳐서 때우려는 것이라며 업무를 중단하고 파업에 나선다. 업무를 지속하는 직원만 함께 갈 수 있다며 은근한 협박을 해오는 사측과 노조에 가입하는 사람이 많아야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는 노조 대표 윤희(최솔희 분) 사이에서 하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동류의 다른 작품이 그랬듯이, 이 작품 역시 기본적인 구조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의 갈등에 기댄다. 노조와 사측, 투쟁에 참여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 사이의 대립이다. 하지만 명세진 감독은 하나의 레이어를 더 설치하며 시선을 조금 비튼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직 계약이나 노조와 같은 회사의 생리로부터 익숙하지 않은 인물을 배치하는 일이다. 그에게는 어느 쪽의 이야기도 비슷한 무게를 가진 압력이 된다. 내일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당장의 수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지금 급여를 지급할 능력이 있는 회사의 말을 듣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그가 작업복을 입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단지 그뿐이다.

 영화 <벌레> 스틸컷
영화 <벌레>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3.
"정말 마지막이야. 같이 안 할 거야? 네가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니까 그러는 거야."

파업을 주도하는 윤희가 찾아와 설득하는 장면과 사측인 한 팀장(김준범 분)이 내민 하청 계약직 전환 동의서에 이름 석 자를 사인하는 장면은 모두 정확히 하나의 딜레마 사이에 위치한다. 노조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하청 계약직으로 전환된다는 의미가 당장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린 노동자에게 어른들의 사정이 맞부딪히는 시간은 그저 두려움만 남길 뿐이다.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외칠 뿐, 어느 누구도 현재의 상황이나 마주하게 될 내일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제 영화는 하나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다시 비춘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짙은 곰팡이로 인해 벽지가 뜯긴 천장 모서리가 그곳에 있다. 손녀가 일터에 나가 있는 동안 곰팡이가 떠다니는 떡국을 홀로 챙겨 먹는 할머니의 모습도 함께다.

정규직, 계약직의 문제를 떠나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하나의 사정이 공장 바깥의 장면에 위치한다면, 어떤 비참한 대우를 받더라도 그만둘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은 공장 내부의 화면 속에 담긴다. 과열된 기계를 다루는 작업을 하는 동안 수도 없이 데이며 생긴 화상 자국은 그중 하나다. 파업에 참여하는 인원 대신 현장 일을 돕기 위해 내려왔다는 사무 정규직 직원들은 같은 자리에 서자마자 어떻게 이런 일을 자신에게 시키냐며 불만을 드러낸다. 하나는 그동안 그 일을 왜 참고 버텨내야만 했을까. 자신의 팔등이 타들어 가는 동안에 아무런 불평 하나 하지 못하고. 이유는 하나다. 내일을 위한 월급.

04.
파업에 참여했던 노조가 사측과의 협상에 성공하고 공장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그동안 회사의 말만 믿고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채로 열심히 일만 했던 직원들은 이제 하청업체 소속으로 전환된 상태로 회사에서 쫓겨날 처지가 된다. 동의서에 사인을 마친 하나도 마찬가지다. 되려 파업에 참여한 이들만이 회사에 남아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쥐꼬리만 한 월급만 제때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노조에도 가입하지 않고, 파업 대신 출근을 선택했던 것인데 이제 더 이상 직원이 아니라는 냉혹한 대답만이 돌아온다.

우습기도 하다. 어떤 소용돌이에도 휩쓸리지 않길 바라며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사측과 노동자 사이에서 한번, 공장 노동자와 사무 노동자 사이에서 한번, 마지막으로 노조에 가입된 노동자와 가입되지 않은 노동자 사이에서까지 갈등을 또 한번 겪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파업에 나선 어른들의 사정을 지나 회사로 출근한 일? 계약직 전환 동의서 앞에서 팀장의 눈치에 못 이겨 질문 하나 하지 못하고 사인을 했던 일? 그것도 아니라면 정대리(김효진 분)처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못했던 일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자리에도 할머니와 하나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사정은 놓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벌레> 스틸컷
영화 <벌레>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후반부에 이르러 감독은 일터를 잃은 노동자의 모습을 벌레에 빗대어 표현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주어진 상황 속에 자신을 갈아 넣고 태우는 동안 새겨지는 상처 위에서 비유의 이미지 하나가 떠오른다. 목소리를 높여보지만 어느 하나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실상과 망가지고 부서지도록 뛰어보지만 뒷받침되지 못하는 제도와 현실의 냉혹함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마는 수많은 이들의 표상이다. 하찮고 볼품이 없어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천대받고 쫓겨나기 쉽기에 형용되는 자리다.

영화의 처음에서 하나와 할머니의 모습이 따뜻한 색감으로 채워지는 것을 봤다. 하청 계약직 동의서와 노조의 파업 사이에 서 있을 때 두 사람의 집으로 푸르고 시린 빛이 쏟아져 내렸다. 회사에서 쫓겨난 다음, 지금은 어떤 장면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언젠가 집으로 돌아와 제 방에서 홀로 터뜨리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할매 내 회사에서 잘렸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우리 이제 우짜노."
덧붙이는 글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유통 배급 환경 개선을 위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가 ‘2024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90편(장편 22편, 단편 68편) 전 작품을 상영하는 스페셜 기획전을 진행합니다. 2024년을 대표하는 다양한 독립예술영화를 2월 한 달 동안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벌레 노동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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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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