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04.
"영혼을 고칠 순 없어요. 의사는 신이 아니에요."
부와 권력, 가족까지, 이전 삶의 모든 것을 포기했으나 여성이 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소망을 이루며 에밀리아 페레즈가 된 남자. 영화는 런던에서 리타를 재회(혹은 의도된 만남)하는 장면까지의 4년이라는 시간을 과감히 쳐낸다. 물론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라 루세시타'라는 아직 찾지 못한 이들의 유해를 되찾아주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하는 등의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준 이후의 장면들은 자신이 꿈꾸던 그대로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문제는 역시 온전히 쳐내지 못한 과거다.
아직 여성이 되기 전의 마니타스는 자신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족 모두를 스위스로 망명시키고, 스스로를 공식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위장했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대사 하나가 있다. 영혼은 고칠 수 없다던 의사의 말이다. 리타를 다시 찾은 에밀리아는 그저 아이들을 다시 자신의 곁으로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한다. 마니타스로서의 삶에서 채우지 못한 것이 정체성의 문제였다면, 에밀리아의 삶에 빠져있는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이다. 어떤 내일은 그 모습을 알고 있더라도 감당할 수 없게 되곤 한다.
거울 속에 보이는 외면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두 아이와 아내 제시를 곁에 두기 시작하면서부터 과거의 잔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가 과거의 마니타스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조금 더 추악하고 형태를 하고서다. 카르텔을 운영하며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와 악행의 그림자, 그때는 알지 못했던 사랑했던 이의 감춰진 욕망과 같은 것들. 심지어 그는 재단의 지지와 공감을 얻기 위한 자선 행사에 과거 자신이 알고 지내던 돈 많고 부패한 권력자들을 초청하는 모습도 보인다. 처음의 의지와 달리 그는 지금의 삶 속에 과거를 너무 쉽게 들이고 이용한다. 새로운 삶을 얻은 그가 그 어두운 자리를 딛고 속죄하는 모습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사랑을 표현하려는 모습과는 또 다른 문제다.
05.
"반은 남자, 반은 여자.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니지. 대체 나는 누구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그가 현실 뒤에 정체성을 숨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그는 에밀리아라는 외형 뒤에 마니타스의 정신을 감춘다. 타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현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오롯이 여성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일 위에서도 숱한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한데, 오히려 과거의 자신까지 붙들면서 더 큰 고난을 자초한다. 영화가 에밀리아를 과거도 현재도 아닌, 그 사이의 애매한 공간 속에 가둬둘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처음에 그가 여성이 되고자 했던 이유를 이 지점에서 다시 묻게 된다.
에밀리아가 여성인 플로레스(아드리안나 파즈 분)와 사랑을 경험하는 내러티브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사랑에 형태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지만, 전체 서사 위에서는 그 욕망(바람)이 가진 모든 측면을 껴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된다. 여성이 되고 난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가족을 곁에 두고 난 후에 일어날 모든 상황, 과거의 잘못을 씻기 위한 재단을 만들며 사회적 위치를 가진 인물이 되고 나서 마주하게 될 모든 순간. 물론 미래의 일을 가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해, 어지간한 다짐과 결심으로는 쉽게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에밀리아가 된 마니타스의 마지막 모습처럼.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주)
06.
영화의 말미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은 앞서 설명했던 변형된 외형 뒤에 감춰놓았던 자아 위에서 펼쳐진다. 그 전개가 다소 고전적이기는 하나,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한 대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마지막 자리에 작은 희망 하나를 놓아둔다. 모든 이야기와 설정을 차치하고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에 설득되는 것은 우리는 타인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섣불리 그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영화도 인정하고 나아가고 있어서다. 이는 스크린 앞에 앉은 관객은 물론 극중 인물인 리타에게도 통용된다. 택시 안 리타의 감정을, 여성 속옷을 처음 착용하는 에밀리아의 마음을,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게 어떤 것인지(모두 뒤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의 삶에서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모른다던 이의 말을 우리는 가늠할 뿐,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장면이 끝나고 난 다음 떠올랐던 짧은 대사 하나가 있다. 영화 속 서로 다른 장면에서 두세 차례 반복하여 등장하는 문장이다. 내게는 이 말이 지금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외롭고도 나약한 한 인물의 삶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우연히 온 거 아니야."
3월 12일 정식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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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