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재개봉 전성시대다. 말이 전성시대지 투자위축과 OTT 서비스의 확장, 극장의 위기 속에서 적잖은 영화사가 재개봉을 궁여지책으로 꺼내 들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과 배급에 들어가는 돈이 적고, 독립영화 신작보단 홍보가 더욱 쉽다는 점에서 재개봉작은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역량을 신작 독립영화에 기울이겠다던 업체들조차 '안 돼도 본전, 잘 되면 땡큐'인 재개봉을 만지작거린다.
2025년 시작부터 재개봉 영화가 쏟아지다시피 한다. <러브 레터>·<죽은 시인의 사회>·<클로저>·<미드나잇 인 파리>·<원더>·<멀홀랜드 드라이브>·<멜랑콜리아> 등의 작품이 재개봉해 관객과 만났다. 줄줄이 실패하는 신작들, 가뜩이나 파리 날리는 극장가에 그래도 숨을 터주는 기획 재개봉이란 점에서 가치가 없지 않으나, 한편으론 한숨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업계 관계자들은 재개봉작이 극장으로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계기가 되어주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로부터 '재개봉작도 잘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듣는 경우가 많아졌단 건 과거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재개봉이 더는 신작과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갈수록 비관적이 되어가는 영화산업에 그래도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인식 때문일 테다.
▲클로저포스터
글뫼
개봉 20주년, 벌써 4번째 재개봉
<클로저>는 재개봉만 벌써 세 번째 맞는 사골국 같은 영화다. 2005년 처음 개봉한 이래 2017년과 2021년, 그리고 올 2월 재개봉해 관객과 만났다. 개봉 당시 20만 정도의 관객이 들어 흥행작이라 보긴 민망한 성적을 거뒀으나 입소문을 탄 끝에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명작으로 자리했다. 재개봉 시점을 보면 알 수 있듯, 극장가가 관객 축소로 위기를 겪는 시점마다 <클로저>는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대단한 관객은 모으지 못했대도 더 나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실망스러운 신작들 사이에서 그래도 믿고 보는 재개봉작으로 말이다.
2월 초 <클로저>는 한국 박스오피스 상위 20위 안에 안착했다. 민망하게도 개봉신작 상당수보다 높은 위치다. 그리 많지 않은 상영관에도 꾸준히 발길이 이어진다. 주변에서 <클로저>를 새로 본 이들 상당수가 앞서 영화를 본 이들이란 점에서, 근래 재개봉 흐름을 짐작하게 한다. 새로운 서사가 아닌,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본다는 경험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이 영화의 주된 관객층이 된다.
<클로저>는 동명 유명 연극을 원작으로 한다. 결말부를 제외하곤 설정과 전개가 대체로 같은데, 연극과 영화란 매체가 가진 서로 다른 특성이 양편 모두에서 적절히 멋을 발휘한단 평이다. 지난해 대학로에서 연극 공연이 이뤄지며 새삼 관심을 모으기도 했던 <클로저>가 이번엔 영화 재개봉으로 다시금 관객과 만났으니, 같은 작품을 서로 다른 형식으로 즐길 줄 아는 이들에겐 꽤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
▲클로저스틸컷
글뫼
네 남녀가 겪는 뜨겁고 서러운 사랑 이야기
영화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네 명의 남녀가 맺는 관계를 다룬다. 사랑이 일어나고 다시 그 사랑이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여느 연인이 겪을 수 있는 관계의 본질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앨리스(나탈리 포트만 분)는 스트립 댄서다. 말 그대로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야한 춤을 추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녀가 어느 날 길을 걷다 차에 받힐 뻔하고, 그를 지나가던 기자 댄(주드 로 분)이 구한다. 우연히 만난 여자의 예쁘고 섹시한 모습에 그대로 반한 댄은 앨리스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둘 사이가 안정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시간이 흘러 댄은 제 여자가 된 앨리스의 삶을 소재로 책을 써 출간한다. 그 과정에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를 만나고,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예쁘기만 한 앨리스와 달리 지적인 안나에게 끌림을 느낀 댄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선다. 애인이 있는 남자의 치근덕거림을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안나지만, 자꾸만 그가 떠오르는 것을 어쩌랴.
▲클로저스틸컷
글뫼
서로 다른 사랑, 서로 다른 진심
그러던 어느 날 댄의 장난이 촉매가 되어 안나는 새로운 남자 래리(클라이브 오웬 분)와 만난다. 그와의 로맨스 끝에 래리와 결혼에 이른 안나, 그러나 영화는 두 커플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파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막장 연속극과 관계에 대한 성찰이 담긴 드라마 사이를 오가며 풀어낸다.
낯선 타인이 가까운 연인이 되고, 그로부터 서로를 상처 입히고 다시 멀어지는 이야기는 사실 일상다반사가 아닌가. 각자의 인생에선 모든 걸 뒤흔드는 일대 사건처럼 보이지만, 또 세상의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댄과 안나, 래리와 앨리스가 겪는 일련의 이야기는 그렇게 특별하고 또 특별하지 않은 무엇이 된다.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다가가 그를 탐하고 또 책임을 다하려 하고 실수를 반복하고 마침내 관계가 파국을 맺는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제 삶에서도 얼마든지 겪어낼 수 있는 관계성을 발견한다. 어떤 것은 잘 되고 또 어느 것은 잘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무책임하고 또 누구는 충실하지만 결과는 그로부터 엇갈리지 않는다. 관객은 이들의 뒤얽힘 가운데서 부조리함을 마주하고, 그건 그대로 부조리극이 갖는 삶의 일면을 비추어낸다.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으나 어떻게든 흘러가고 이뤄지는 삶과 관계가 이 영화 가운데 들어 있다.
▲클로저스틸컷글뫼
진심을 대하는 각자의 방식
영화는 각 인물이 사랑과 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댄에게 사랑은 끌림이고 즐김이다. 또 솔직함이기도 하다. 앨리스에겐 희생이며 책임이다. 안나에겐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고 래리에겐 수용이다. 그중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영화는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 모두가 사랑이며 관계의 일면 아닌가.
영화의 끝에서 재결합한 이들과 파국에 이른 이들이 또 영화 뒤 그와 같은 모습으로 귀결될지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연극과 영화가 서로 다른 결말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관계와 감정, 삶과 애정을 그리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때문이다.
<클로저>의 미덕은 복잡다단한 인물들의 관계맺음을 통해 관객 각각이 저를 둘러싼 관계의 모양을 생각하도록 하는 데 있다. 때로 관계는 그 모양을 응시할 때만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법, 집착과 애정, 책임과 순수, 그야말로 온갖 것을 우리는 관계와 사랑이라 뭉뚱그려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개봉 20년이 흐르도록 관심을 받는 영화 <클로저>의 비결이 여기에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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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사랑 향한 고찰 담은 '이 영화', 개봉만 네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