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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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 토스의 예술가이자 신참 이민자로서의 생존투쟁 결과가 거대한 문화센터 건축 과정이라면, 그의 후원자인 동시에 고용주인 해리슨 반 뷰렌에게 이 프로젝트는 어떤 의미일까? 그저 통 크게 망명 예술가를 후원하는 선량한 사업가라면 영화의 흥미는 다소 뻔하게 흐를 테지만, 제작진은 해리슨이란 캐릭터를 단순한 '빌런'이나 반동적 인물로 그치게 할 생각이 없다. 무척이나 복합적이고 모순된, 하지만 강렬한 개성을 지닌 존재로 라즐로에게는 마치 미국 그 자체인 것 같은 위압감을 뿜어낸다.
주인공이 전후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옮겨오는 순간부터 극적이다. 이민선의 비좁은 선내에서 유럽 이민자라면 가장 처음 접하게 마련인 뉴욕 부두의 자유의 여신상이 그들을 위압하 듯 내려다본다. 대개 수평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기울어진 채 언제든 추락할 듯 구도부터 의도적이다. 뉴욕을 떠나서 필라델피아, 바로 미국 독립선언이 일어난 발상지로 향하는 버스에서 라즐로는 밝은 미래를 꿈꾸지만, 누구도 그의 진가를 알지 못해 무료급식과 막일을 전전하는 영락을 맛본다. 영어가 유창한 전문직 경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리슨 역시 처음엔 가구점 직원의 주제넘은 리모델링에 격분해 하대를 일삼지만, 주인공이 건축 명문 '바우하우스' 출신이란 걸 알자 대접이 바뀐다. 이 대목은 무척 암시적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을 떠나 생계를 위해 대서양을 건넌 유럽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것 같지만, 유서 깊은 구대륙의 문화예술을 온전히 체화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는 '졸부' 근성이 반 뷰렌 일가를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기능적으로 설계한 서재 리모델링을 폄훼하던 해리슨이 뒤늦게 세간의 평판을 얻자 무례하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
하지만 해리슨은 라즐로를 마치 르네상스 시대 지중해 무역으로 거부를 쌓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자신의 명망을 위해 예술가를 후원하던 행태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눈부신 예술이 창조되던 당대 이탈리아는 마키아벨리가 개탄하듯 정치적 분열과 도덕적 타락이 팽배하던 땅이다. 예술가 역시 벼락부자 상인들의 위세와 명성을 경쟁하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제작진은 주인공이 처한 근본 조건 역시 다르지 않음을 은유한다. 마치 야생동물 무리에서 서열을 확인하듯 틈만 나면 모욕적인 순간이 닥친다.
게다가 통 크게 지역 사회에 부를 환원한다는 명분과 달리 뷰렌 가문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손해를 보지 않고자 전전긍긍한다. 오늘날도 익숙할 풍경이다. 라즐로는 수전노 행태와 고용인 취급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한 거대한 프로젝트에 인생을 쏟아붓는다. 막무가내 요구에 골치를 앓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보수를 포기하며, 천신만고 끝에 재회한 가족과 멀어짐을 감수하며 여러 차례 중단 위기를 돌파해 나간다. 그렇게 건축은 인생이 되어간다. 또한, 주인공의 삶은 그가 창조한 건축으로 기억될 운명이다.
<브루탈리스트>에서 관객은 정교한 건축 설계도를 감상하듯, 촘촘하게 짜인 씨줄과 날줄이 무게를 분배하고 융합하며 쌓여가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흔히 오해하듯 '브루탈리즘'은 콘크리트로 채워낸 특색 없는 덩어리가 아니다. 우리가 안도 다다오의 대표작 <빛의 교회>에서 접했던 형언하기 힘든 숭고한 감화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목격한다면, 시대와 예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하게 될 테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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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
2024|미국|시대극/드라마
2025.02.12. 개봉|215분|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브레이디 코벳
주연 에이드리언 브로디, 펄리시티 존스, 가이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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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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