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1950-60년대 세계 건축계를 선도한 사조 '브루탈리즘' 건축가의 일대기를 선보인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미국의 권위 있는 시상식인 골든글러브와 크리틱스초이스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석권하며 최근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작가주의 영화로 오르내리는 작품이다. 이쯤 되면 독립예술영화 관객층의 관람 1순위라 해도 모자람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상영시간을 확인하면 안색이 바뀔 테다. 무려 215분이다. 이 분야의 끝판왕인 <반지의 제왕> 3부작에 필적하는 규모다. 심지어 중간 휴식 시간이 배치될 정도다. 장대한 중간계의 대하 판타지를 구현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두근두근 호기심을 안고 보게 된 <브루탈리스트>는 웅장한 서사시이자, '고전' 반열에 오를 만한 깊이를 지닌 역작이다. 보고 나면 왜 엄청난 상영시간을 설정했는지 고개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었다. 대체 이 낯선 영화가 무엇을 구현했기에.

바벨탑 쌓는 모험처럼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UPI 코리아

유대계 헝가리 건축가 '라즐로 토스'는 2차 대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미국행 이민선에 오른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미국에 정착한 사촌 '아틸라'가 있는 필라델피아로 향한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미국인 아내와 결혼 후 이름도 '밀러'라는 미국식으로 개명한 사촌의 가구점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가구 제작을 돕게 된다.

어느 날, 가구점에 큰 일감이 들어온다. 지역의 부호 '반 뷰렌'의 저택 서재 리모델링을 맡게 된 것이다. 출장 중인 부친 '해리슨'을 위한 깜짝선물로 그의 자녀들이 의뢰한 건이다. 라즐로는 배짱 있게 단가를 제시하고, 오랜만에 본업에 복귀한 기쁨으로 일에 매진한다. 도전적인 아이디어로 서재 작업을 완료하지만,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해리슨은 벌컥 화를 내며 마무리 작업하던 라즐로를 내쫓는다. 게다가 저택을 훼손했다며 공사대금도 받지 못한다. 사촌은 이를 빌미로 그를 내보내고 만다.

달리 갈 곳이 없는 처지라 노숙자 쉼터를 전전하며 막노동에 종사하던 라즐로에게 얼마 후 해리슨이 느닷없이 방문한다. 저택의 서재가 미국의 유력한 건축잡지에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그 잡지에는 라즐로가 유럽에서 작업한 건축물 기사도 실려 있었다. 저택과 자신의 명성을 잔뜩 높여준 공적을 몰라본 자신의 행적을 사과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저택 파티에 라즐로를 초대하고, 손님들 앞에서 자신의 작고한 모친 이름을 딴 문화센터 건립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그 디자인은 라즐로의 몫이다.

미국에 온 후 처음으로 제대로 건축가 본업을, 그것도 지금껏 맡은 프로젝트 중 가장 거대한 도전에 직면한 라즐로는 혼신을 기울여 작업에 임한다. 해리슨의 후원으로 유럽에서 발이 묶여 이산가족이 된 아내 '에르제벳'과 의지할 곳 없는 조카 '조피아'도 어렵사리 상봉한다. 모든 게 만사형통 같지만, 거대하고 혁신적인 건축 계획은 거듭 암초에 부딪힌다. 유럽에서 온 가난한 이민자, 게다가 유대인이라는 낙인은 라즐로의 혁신적 프로젝트를 향한 의혹과 불신을 양산한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연거푸 터진다. 당대 건축계의 최신 사조인 브루탈리즘을 전면화한 문화센터 디자인 관철을 위해 기존 건축계와 맞서고, 유대인 혈통 탓에 보수적인 지역 사회는 끊임없이 의구심을 던진다. 은인으로만 여기던 후원자 해리슨의 이면이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한다. 라즐로의 예술성을 예찬하고 지원한다면서도 해리슨 일가는 비용 증가에 질색하고, 고용주와 고용인이란 수직 상하 관계를 은연중에 내세운다. 라즐로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오로지 공사에만 매달린다.

시대를 풍미한 건축 사조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UPI 코리아

<브루탈리스트>는 장대한 상영시간이 허투루 쓰이지 않은, 흥미로운 열쇠와 장치로 빼곡하게 채워진 거대한 톱니바퀴 기계와 같은 중량감을 시종일관 선보인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문화센터 건축 과정과 영화의 전개가 닮은꼴이란 점을 금방 깨닫게 될 테다. 서막-1막-2막-에필로그로 정교하게 분할된 이야기는 단선적인 전개와는 거리가 먼, 여러 축이 탄탄하게 하중을 분산하며 떠받치는 현대 건축의 정수에 비견될 만하다.

우선 이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한 '브루탈리즘' 건축 사조의 대두와 그 과정에서의 충돌을 실감 나게 구현한다. 근현대 건축 역사의 흐름 속에서 치열한 작용·반작용을 거치며 시대 상황에 조응하던 경향이 역사적 배경을 빠짐없이 갖추고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은 장관을 이룬다.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에서 기원한 이 신사조는 발음이 흡사한 영문 단어 'brutal' 때문에 종종 의미가 오독되지만, 어원처럼 근대 산업 문명의 산물인 콘크리트와 철강을 이용하는 기능성에 극도로 치중한 방법론이다. 비슷한 신고전주의와 얼핏 흡사한 외관이지만, 과시적인 면모의 고전주의와 대비되는 철저한 절제와 군더더기 없는 효율, 그리고 간소하면서도 인문학적 고려가 융합되어 2차 대전 전후부터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다.

영화는 유럽에서 최신 건축 사조를 마스터한 라즐로가 아직 신경향이 상륙하지 않은, 하지만 브루탈리즘 구현에 이상적인 조건의 미국에서 펼치는 시대정신의 구현을 큰 줄기로 삼는다.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무기고' 노릇을 수행하며 초강대국의 위상을 획득한 미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거대한 산업을 가동하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블랙홀처럼 온갖 분야의 전문가를 흡수하던 시절이다. 주인공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새로운 안식처로 미국행에 올랐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꾼 수많은 이민자 중 하나다.

반 뷰렌 가문이 의뢰한 프로젝트는 유럽에서 다양한 공공건물을 작업한 라즐로에게도 지금껏 시도하지 않은 거대한 규모다. 이 건물을 제대로 완성하는 것은 곧바로 주인공의 '아메리칸드림'으로 구현되는 것과 일치하는 의미로 다가온다. 따라서 언뜻 보기엔 지극히 건조하고 개성 없어 보이는 라즐로의 건물이 올라가는 과정은 새로운 시도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편견과 의심에 맞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수난의 총합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혼잡한 공사 현장과 완공된 건물 외엔 그 창조 과정을 온전히 볼 기회가 드물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진기한 기회를 제대로 제공한다. 마치 한 사람의 기구한 일생과 수백수천 명의 삶·현대 과학기술의 산물, 이를 활용하는 예술가의 투혼이 대칭을 이루듯 <브루탈리스트>는 전후 과정을 격렬하게 형상화한다.

'졸부' 미국의 상징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UPI 코리아

라즐로 토스의 예술가이자 신참 이민자로서의 생존투쟁 결과가 거대한 문화센터 건축 과정이라면, 그의 후원자인 동시에 고용주인 해리슨 반 뷰렌에게 이 프로젝트는 어떤 의미일까? 그저 통 크게 망명 예술가를 후원하는 선량한 사업가라면 영화의 흥미는 다소 뻔하게 흐를 테지만, 제작진은 해리슨이란 캐릭터를 단순한 '빌런'이나 반동적 인물로 그치게 할 생각이 없다. 무척이나 복합적이고 모순된, 하지만 강렬한 개성을 지닌 존재로 라즐로에게는 마치 미국 그 자체인 것 같은 위압감을 뿜어낸다.

주인공이 전후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옮겨오는 순간부터 극적이다. 이민선의 비좁은 선내에서 유럽 이민자라면 가장 처음 접하게 마련인 뉴욕 부두의 자유의 여신상이 그들을 위압하 듯 내려다본다. 대개 수평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기울어진 채 언제든 추락할 듯 구도부터 의도적이다. 뉴욕을 떠나서 필라델피아, 바로 미국 독립선언이 일어난 발상지로 향하는 버스에서 라즐로는 밝은 미래를 꿈꾸지만, 누구도 그의 진가를 알지 못해 무료급식과 막일을 전전하는 영락을 맛본다. 영어가 유창한 전문직 경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리슨 역시 처음엔 가구점 직원의 주제넘은 리모델링에 격분해 하대를 일삼지만, 주인공이 건축 명문 '바우하우스' 출신이란 걸 알자 대접이 바뀐다. 이 대목은 무척 암시적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을 떠나 생계를 위해 대서양을 건넌 유럽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것 같지만, 유서 깊은 구대륙의 문화예술을 온전히 체화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는 '졸부' 근성이 반 뷰렌 일가를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기능적으로 설계한 서재 리모델링을 폄훼하던 해리슨이 뒤늦게 세간의 평판을 얻자 무례하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

하지만 해리슨은 라즐로를 마치 르네상스 시대 지중해 무역으로 거부를 쌓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자신의 명망을 위해 예술가를 후원하던 행태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눈부신 예술이 창조되던 당대 이탈리아는 마키아벨리가 개탄하듯 정치적 분열과 도덕적 타락이 팽배하던 땅이다. 예술가 역시 벼락부자 상인들의 위세와 명성을 경쟁하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제작진은 주인공이 처한 근본 조건 역시 다르지 않음을 은유한다. 마치 야생동물 무리에서 서열을 확인하듯 틈만 나면 모욕적인 순간이 닥친다.

게다가 통 크게 지역 사회에 부를 환원한다는 명분과 달리 뷰렌 가문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손해를 보지 않고자 전전긍긍한다. 오늘날도 익숙할 풍경이다. 라즐로는 수전노 행태와 고용인 취급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한 거대한 프로젝트에 인생을 쏟아붓는다. 막무가내 요구에 골치를 앓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보수를 포기하며, 천신만고 끝에 재회한 가족과 멀어짐을 감수하며 여러 차례 중단 위기를 돌파해 나간다. 그렇게 건축은 인생이 되어간다. 또한, 주인공의 삶은 그가 창조한 건축으로 기억될 운명이다.

<브루탈리스트>에서 관객은 정교한 건축 설계도를 감상하듯, 촘촘하게 짜인 씨줄과 날줄이 무게를 분배하고 융합하며 쌓여가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흔히 오해하듯 '브루탈리즘'은 콘크리트로 채워낸 특색 없는 덩어리가 아니다. 우리가 안도 다다오의 대표작 <빛의 교회>에서 접했던 형언하기 힘든 숭고한 감화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목격한다면, 시대와 예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하게 될 테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
영화 <브루탈리스트> 스틸 이미지UPI 코리아

<작품정보>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
2024|미국|시대극/드라마
2025.02.12. 개봉|215분|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브레이디 코벳
주연 에이드리언 브로디, 펄리시티 존스, 가이 피어스
수입/배급 UPI 코리아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브루탈리스트> 포스터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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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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