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측의 부당함에 맞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카트>가 개봉했다. 2009년 공효진, 신민아 주연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연출했던 부지영 감독의 신작 <카트>는 염정아와 문정희, 고 김영애, 김강우 등 베테랑 배우들과 <써니>·<한공주>로 주목받은 천우희, 보이그룹 엑소의 멤버 도경수 등 신예 배우들의 연기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었다.
하지만 배우들의 좋은 연기, 날카로운 주제 의식과 별개로 <카트>는 전국 81만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애초에 규모가 크지 않아 여느 대작들처럼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했고 극장가의 비수기였던 11월이라는 개봉 시기도 악재로 작용했다. 극장 나들이에 어울리지 않는 파업, 노동 문제 같은 무거운 소재 역시 <카트>의 흥행을 막았던 요소였다.
그렇게 <카트>는 '좋은 배우들이 나온 의미 있는 영화'라는 정도의 성과만 남긴 채 대중들에게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카트>가 개봉한 지 약 1년이 지난 2015년 10월 또다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제작·방영됐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최규석 작가가 연재했던 동명의 사회 고발 웹툰을 드라마로 만든 지현우, 안내상 주연의 jtbc 주말 드라마 <송곳>이었다.
▲<송곳>은 2000년대에 있었던 대형마트의 노사갈등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드라마다.
<송곳> 홈페이지
부드러운 멜로왕자 지현우의 파격변신
학창 시절부터 음악을 배우면서 록음악에 심취했던 지현우는 2003년 KBS 공채탤런트로 데뷔했다. 지현우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알렸던 작품은 2004년 지현우PD 역을 통해 '국민 연하남'으로 떠올랐던 KBS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였다. 지현우는 같은 해 <사랑의 바보>를 부른 밴드 더 넛츠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는데 당시 대중들은 '더 넛츠'에 <올드미스 다이어리> 지피디가 있다"며 신기해했다.
그렇게 부드러운 연하남 이미지로 인기를 쌓던 지현우는 2007년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에서 백수나 다름없는 무협소설가 강대구 역을 맡아 코믹 연기에 도전했다. 2008년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영화감독 지망생, <내 사랑 금지옥엽>에서 연애의 고수를 연기한 지현우는 2009년에도 <천하무적 이평강>에서 1400년 만에 환생한 우온달을 연기하며 필모그라피를 쌓았다.
2010년 영화 < 주유소 습격사건2 >와 2011년 <미스터 아이돌>이 흥행 실패하면서 주춤하는 듯했던 지현우는 2012년 tvN 드라마 <인현황후의 남자>를 통해 다시금 인기를 회복했다. <인현황후의 남자>를 마치고 군에 입대한 지현우는 2014년 전역 후 2015년 <송곳>에서 군장교 출신의 대형마트 파트과장 이수인 역을 맡았다. <송곳>은 지현우와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김석윤PD가 10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마트를 찾아 노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역 연구에 몰두한 지현우는 <송곳>에서 깊이 있고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극찬을 받았다. 2018년에 출연했던 영화 <살인소설>을 연출한 김진묵 감독은 <송곳>을 보고 지현우의 캐스팅을 결정했을 정도. 결과적으로 <송곳>은 지현우에게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작품이 됐다.
지현우는 2020년 '사거리 그 오빠'라는 밴드를 결성해 미니앨범을 발표하면서 9년 만에 가수로 복귀했다(사거리 그 오빠는 작년에도 싱글을 발표하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지현우는 2021년 KBS 주말 드라마 <신사와 아가씨>에 출연해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견인하면서 2021년 K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지현우는 작년에도 KBS 주말 드라마 <마초와 순정남>에서 임수향과 연기 호흡을 맞췄다.
'시청률' 이상의 가치와 의미 있었던 드라마
▲언제나 이성적으로 상황을 대처하던 이수인은 사측의 부당한 대우에 극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흑화한다.
jtbc 화면 캡처
<송곳>을 연출한 김석윤 감독은 <해피 투게더>,<공포의 쿵쿵따> 같은 인기 예능프로그램을 연출했던 스타PD 출신이다.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에 이어 2011년 478만 관객을 동원한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을 연출했던 김석윤 감독이 무거운 소재의 드라마 <송곳>을 연출한 것은 다소 의외의 선택이었다(김석윤 감독은 훗날 <눈이 부시게>·<로스쿨>·<나의 해방일지> 등 다양한 작품을 연출했다).
<송곳>은 지난 1994년 한국에 진출했다가 2006년에 철수한 프랑스계 대형 유통 회사에서 있었던 사측과 노조의 갈등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드라마다. 육사 출신으로 대위로 전역한 후 대형마트에 취업한 이수인 과장(지현우 분)은 부당하게 해고 처분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며 그들의 편이 되기로 한다. 이수인은 자신의 결심을 '오물을 뒤집어쓴 뒤에 찾아오는 역설적 자유'라고 표현했다.
일부 노동조합의 파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파업 현장 앞 줄에서 구호를 외치는 사람을 '전문 시위꾼'이라고 비난 하기도 한다. 하지만 <송곳>에서는 노조 활동과 파업을 비판하거나 옹호하기보다는 당장 이번 달 월급이 나오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워지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무거운 주제인 노동 문제를 어렵지 않게 접근했다.
이수인과 함께 <송곳>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안내상이 연기한 노동상담소 소장 고구신이다. 고구신은 이수인을 비롯한 푸르미 노조원들의 멘토로 지금도 동영상 사이트에서 '송곳 안내상'을 검색하면 드라마 속 고구신의 노동 강의 영상들을 찾을 수 있다. 젊은 시절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만성 심부전을 앓고 있는 고구신은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가 사무실 건물 경비로 오면서 혼란을 겪는다.
<송곳>은 비정규직과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흔치 않은 드라마였지만 1회 시청률 2.2%가 최고 시청률이었을 정도로 인기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었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애초에 러브 스토리는커녕 러브라인조차 없는 사회 고발 드라마를 주말 10시대에 편성했으니 시청률이 잘 나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송곳>은 우리 삶과 밀접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던 의미 있는 드라마였다.
생존 위해 악역을 자처해야 했던 관리자
▲김희원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역을 자처한 관리자 정민철을 연기했다.jtbc 화면 캡처
영화 <기생충>의 문광 역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배우 이정은은 최근 <낮과 밤이 다른 그녀>·<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조명 가게> 등에서 잇따라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정은은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송곳>에서 야채청과의 직원 김정미 역을 맡아 특유의 '현실 연기'를 선보였다. 처음엔 매사에 이성적인 이수인 과장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 강태양 역을 맡아 이세영과 함께 KBS 연기대상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던 현우는 <송곳>에서 야채 청과 파트의 주임이자 노조 지부장 주강민을 연기했다. 주강민은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수인과 달리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직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노조 지부장에 당선됐다. 주강민은 <송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밝은 성격을 유지하는 유일한 캐릭터다.
지난해 연말에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조명 가게>를 연출하며 주목받은 배우 김희원은 악역 전문배우 이미지가 강했던 시절 <송곳>에서 현장 사원에서 마트 부장까지 올라선 정민철 역을 맡았다. 노동자의 편에 서는 이수인과 대비되는 대단히 악질적인 관리자로 나오지만 사실 정민철 역시 상사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생계형 빌런'으로 후반으로 갈수록 인간미를 보여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이번 생은 처음이라>,<킹더랜드> 등에서 귀여운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김가은은 <송곳>에서 고구신이 운영하는 부진 노동상담소에서 일을 하는 문소진 역을 맡았다. 정식으로 채용된 직원은 아니지만 노조 문제로 상담소를 드나들다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됐다. 문소진 역시 주강민 못지않은 '명랑 캐릭터'지만 과거 노조 투쟁을 하다가 직장에서 쫓겨났던 아픈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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