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장 보통의 하루>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12년 전에 개봉한 영화 하나를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로렌 스카파리아 감독의 < 세상의 끝까지 21일 >(2013)이라는 작품이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스티브 카렐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는 소행성 충돌로 지구가 사라지기 전까지 21일이 남은 시점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연인이나 가족이 아닌, 옆집에 살면서도 3년 넘게 인사 한번 한 적이 없었던 이웃 도지(스티브 카렐 분)와 페니(키이라 나이틀리 분)라는 것. 두 사람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그렇게 종말을 함께 맞이한다. 아이러니하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이들은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겨우 의지할 수 있는 자리가 낯선 이웃이라는 점이. 영화 <가장 보통의 하루>를 보는 내내 두 사람의 모습이 생각났다.
김주연 감독의 작품 속 이야기도 종말을 앞두고 있다. 오후 7시 30분경, 혜성이 충돌할 것이라고 예고된 날이다. 모두가 혼비백산해 도시를 떠나는 동안, 두 인물은 평소대로 사회복지관 모임에 나간다. 앞을 보지 못하는 수인(송예은 분)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재희(손수현 분)다. 앞서 이야기했던 도지와 페니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두 사람 역시 종말의 날을 기댈만한 가까운 관계가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재희의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다.) 오늘 같은 날, 약속된 시간에 맞춰 사회복지관을 찾는 일은 단순히 부지런하고 성실하기만 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모임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텅 빈 도시 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02.
"우리 오늘 하고 싶었던 거 하나씩 할래요?"
'가장 보통의 하루'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반어적 표현이다. 몇 시간 안에 혜성 충돌로 인해 지구 멸종을 눈앞에 둔 하루를 보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틀렸다고 표현하기도 힘들다. 수인과 재희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두 사람의 상황을 비하하거나 오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남들과 다른 현실 때문에 두 사람은 보통의, 일반적인 생활을 평소에 잘 누리지 못 해왔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곳을 일부러 피하고, 휠체어로 가기 힘든 곳을 멀리해왔던 게 사실. 종말을 이유로 모두 떠나버린 도시의 하천을 편히 갈 수 있게 되는 일은 이들에게 '보통의 하루'처럼 여겨진다.
두 사람이 복지관을 얼마나 다녔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는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같은 모임을 다니며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것 같기는 하지만 딱 그 정도. 사적으로까지 친해 보이는 사이는 아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공기나, 대화를 나누는 톤만 봐도 충분히 그 거리감을 알 수 있다. 역시 아이러니하다. 종말을 하루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야 두 사람은 평소에 나누지 못한 사담을 나누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소원은 무엇인지와 같은 세상의 끝에서 나누기엔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은 이야기들이다. 풀 반지는 또 어떻고. 두 사람 사이로 재난경보 문자가 시시때때로 울리지만, 이미 확정된, 더 이상의 뒤가 없는 사실 앞에서 무엇을 더 주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영화 <가장 보통의 하루>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두 인물이 포개지는 자리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소원을 말하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로 재희는 우주로 향해 몸이 떠오르는 느낌이 궁금하다고 말하고, 수인은 부드러운 바다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두 사람의 대답은 각자가 가진 장애의 범주 안에서 일으켜졌다. 바다 앞에 부드러운 이라는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 것은 앞을 볼 수 없는 대신 피부로 경험했던 바닷가 모래사장의 촉감 때문일 것이다. 우주의 몸이 떠오르는 느낌을 상상하게 되는 것은 휠체어 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의 한계로 인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두 대답이 이 작품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우리 또한 자신의 경험이나 이해 안에서만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어서다.
다시 말하면, 프레임 속에 놓인 두 인물을 제외하고 세계관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은 저마다의 체험과 상식선 안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확정된 종말을 앞두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자 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일 또한 같은 맥락이다.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상상하는 일이지만, 그중에는 오히려 태연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마지막 하루를 보내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조금 멀리 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기저에 깔린, 인물은 과거의 경험에 따라 움직인다는 설정 혹은 이해는 수인이라는 인물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04.
"저는 제가 끝까지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천가를 산책하고, 놀이터에서 안온한 시간을 보내고, 아파트 옥상을 향해 나아가며 한낮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준다.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우연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수인은 이미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마음을 넌지시 드러낸 적이 있었다. 실망한 친구의 표정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이후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먼저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재희에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인에게 오늘 하루는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던 경계를 벗어나면서까지 용기를 내고 싶었던 때가 된다. 보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감각으로도 인지할 수 없고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다. 설명한 대로 다시 쓰자면, 지나온 시간의 영역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시간 앞에서 자신의 틀을 깨고 나와 자신의 세상을 확장하는 일이다.
이후 영화가 두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는 방식은 분명 사랑의 모양에 가깝다.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혜성과 지구가 충돌하며 폭발하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완성하며 또 하나의 우주가 된다. 다만 이 감정의 형태를 단순한 연인 사이의 제한된 감정으로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어느 한 커플의 완성을 위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구축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수인과 재희의 만남 속에는 멸망 이전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종류의 인간적인 감정이 담겨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영화 <가장 보통의 하루>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저 오늘 재희 씨 보고 싶어서 간 거였어요."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끝내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의 끝에 다다른다. 꼭 지구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지 않아도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다. 우리가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은 거창한 소원 따위가 아니라 가장 보통의 하루라는 것을 이 영화가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사소하고 하찮은 장면들이 이 삶을 붙들고 과거를 딛고 나아가려는 몸부림이 내일을 조금 더 빛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복지관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마지막 하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말로 보통의 하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 더 이상 오늘이 없는. 나와 네가 존재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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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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