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역주행한 드라마가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대표적 성공작으로 불린 <지정생존자>다. 내밀한 정치 현실을 박진감 있게 그리는 드라마가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미국에서도 특별히 성공한 작품으로 분류되는 게 바로 이 드라마다. 성공을 발판으로 모두 세 개의 시즌이 제작됐을 정도.
이 드라마가 새삼 재조명된 건 민망하고 참담한 한국의 현실 때문이겠다. 폭탄테러로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을 위시한 사회 지도층 인사 대다수가 사망한 가운데 지정생존자로 테러를 피한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는 얼개가 오늘의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초유의 내란 사태 이후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탄핵안이 국회에서 연이어 가결됐다. 국민이 선출한 적 없는 최상목 기획재정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 역할을 수행하는 한국의 현실이 이 드라마가 다루는 상황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권력이 부재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과 초유의 국가적 혼란을 정치로써 어떻게 돌파하는지 다룬 드라마의 관심이 곧 한국 정치 현실과 맞닿는다.
▲<지정생존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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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정치인의 대통령 수행기
<지정생존자> 첫 번째 시즌은 국가적 혼란 속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 분)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그가 국민들의 열띤 지지와 박수를 받는 모습으로 종결된다. 말하자면 정치 신참인 대통령이 비로소 번듯한 지도자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인데, 총체적 난국 속에서 국정을 수습하려는 분투가 정치와 리더십의 본질을 돌아보도록 한다.
지정생존자는 국가 요인이 모이는 자리가 생기면 그중 한 명을 반드시 빼어 다른 곳에 두도록 하는 제도로부터 나온 개념이다. 한 자리에 모든 요인이 참석했다 사고로 사망할 경우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안전장치로 장관 한 명을 빼두는 것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세계 최강대국 권력을 상징하는 '핵 코드 가방'을 갖고 모처에서 대기하는 역할을 지정생존자가 맡는다. 물론 통상은 그런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지극히 드물어 요인들 사이에선 이를 그저 벌칙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톰 커크먼 또한 그러하여서, 그는 행정부 말단 부처인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으로 대통령 연두교서(State of the Union)가 발표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다. 더구나 그는 그날 아침 백악관으로부터 장관직에서 해임되어 구색만 번듯한 공공기관장으로 좌천되게 되었다는 통보까지 받은 신세다. 이보다 우울할 수 없는 기분으로 그는 집에서 아내와 TV로 연두교서를 보려 했다.
그러나 그날 밤은 미국 역사에 기록될 비극이 벌어진다. 그로 인하여 최상단이 붕괴된 국가의 수장으로 정치 초짜 톰 커크먼이 등극한다. 백악관 생활은 그야말로 좌충우돌, 국회도 법원도 제 기능을 멈춘 상황에서 다시 정부를 정상 가동시켜야 하는 커크먼의 분투가 긴박하게 이어진다.
▲<지정생존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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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정부에서 리더십을 복원하기
드라마는 크게 두 축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국회를 폭파해 권력 최상단에 있는 수백 명을 날려버린 범죄집단을 추적해 맞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으로 리더십을 복원하고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다. 교수 출신으로 소속된 정당이며 지지기반조차 없는 커크먼이 오로지 정의감과 책임감에 의지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는 이를 감동케 한다.
드라마 가운데 한국의 현실을 생각게 하는 장면이 여럿이다. 개중 유독 와 닿는 장면 하나는 14회 '최고사령관 commander in chief' 속 두 대통령의 대화다. 한 명은 현직 대통령인 커크먼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도우려 정계에 복귀해 국무장관 역할을 맡은 전직 대통령 코넬리우스 모스다. 대통령직에 오른 뒤 숨 가쁜 시간을 보내온 커크먼은 백악관 어느 발코니에 서서 처음으로 제 고충을 아는 이와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테러를 일으켰다 주장하는 단체의 수장을 잡기 위해 특수부대 네이비실을 파견하는 결정을 내렸던 커크먼이다. 그의 명령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중 타격대장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고 커크먼은 그를 자책한 일이 있었다. 모스가 커크먼에게 생포작전 직전 네이비실을 찾아 타격대장을 만난 일을 묻는다. 그는 그것이 훌륭한 생각이며 태도였으나 그런 행동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라 말한다. 자신의 결정으로 인하여 죽은 이의 얼굴을 알게 된다는 것, 그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커크먼은 숨진 타격대장 맥스 클락슨과 그 가족들을 매일 생각한다며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러자 모스는 최고사령관이란 그저 직함만이 아니라며, 끔찍할 만큼의 책임감이 있는 자리임을 일깨운다. 때로는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를 결정해야 하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끊임없는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자리.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마주해야 하는 결정권자의 자리라는 이야기다.
▲<지정생존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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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아낄 줄 아는 지도자의 진심
드라마 내내 확인되는 건 커크먼의 진심이다. 그중에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을 위해 그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테러범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리한 작전으로 부대원이 희생되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를 거듭하는 데서도, 또 작전 수행 중 부대원과 민간인을 구하려 저 자신을 희생한 타격대장을 기억하고 괴로워하는 데에서도 사람 한 명을 소중히 여기는 커크먼의 마음이 엿보인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건 사람 한 명을, 그가 저 자신보다 훨씬 열악한 자리에 있는 이일지라도 그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다. 미국의 정치 현실을 고려하자면 다분히 우화적인 드라마로 치부할 수 있겠으나 그 우화가 송곳처럼 아프게 찌르는 것이 또한 한국의 정치 현실이란 사실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내란을 획책하고 탄핵을 당하고서도 제 잘못을 알지 못하는 대통령의 재임기 동안 한국의 시민들은 과연 어떤 리더십을 경험했는가를 떠올린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이 무리한 작전 중에 사망한 사건에 대하여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은 얼마나 참담한 것이었는가. 원칙에 따라 수사하려던 박정훈 수사단장은 석연찮은 이유로 해임되고, 사건 핵심인물인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은 호주대사로 임명돼 수사선상을 벗어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정생존자> 스틸컷ABC
드라마엔 있고 현실에는 없는 것
<지정생존자> 속 커크먼이 제 지위에선 까마득히 보이지도 않는 타격대장을 직접 만나겠다 이야기하고,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 격의 없이 대화하며,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책임을 느끼는 일련의 모습들이 위와 같은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최고사령관이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책임을 오롯이 감당하는 커크먼의 모습으로부터 시청자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리더십을 새삼 확인한다.
<지정생존자>가 당초 십여 편에서 갈무리되는 짤막한 시리즈였다가 무려 이십 회가 넘는 장편 드라마로 세 시즌이 이어지게 된 데는 현실정치에선 마주하기 어려운 원칙, 또 진심이 담긴 정치가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원칙과 진심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찾아보기 어려워 이 드라마를 더욱 매력적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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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국민 아끼는 대통령이라니... 이런 정치인 어디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