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새해가 한 달이나 지났다. 아니다, 늦지 않았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설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아 또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그도 아니면 입춘을 지나면 새해로 삼아도 된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언제든 새해가 될 수 있는 거다.

나로 말하면 설이 지나고 겨울 나뭇가지가 섣부르게 움트는 걸 보니 봄도 멀지 않았구나 싶으면서 비로소 새로운 한 해가 실감이 났다. 그나저나 올 한 해를 또 어떻게 겪어낼까? 그 아득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바로 <퍼펙트 데이즈>(2024)와 <리빙: 어떤 인생>(2023)이다.

[퍼펙트 데이즈] 그저 오늘 하루를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티캐스트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로 시부야 구에 있는 17개의 공중 화장실이 리디자인됐다. 그리고 <베를린 천사의 시>(1987)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빔 벤더스 감독에게 이 프로젝트의 홍보를 맡겼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퍼펙트 데이즈>다. 주인공 아큐쇼 코지가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 남자 주연상을 받았으니 홍보 영화라기엔 무색한, 작품성 높은 영화다.

이른 아침 잠을 깬 히라야마(아큐쇼 코지 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집앞 자판기에서 커피 한 캔을 꺼내 작은 승합차에 오른다. 뒤적뒤적 자신의 테이프들 중 하나를 꺼내 카오디오에 넣는다. 그리고 흐르는 올드팝. '완벽한 날이야'라고 노래한다. 완벽한 날은 어떤 날일까?

일터에 도착하면 그만의 장비를 가지고 화장실 곳곳을 깔끔하게 청소한다. 그의 얼치기 젊은 동료가 '뭐 그렇게 장비까지 만들어 가며 열심히 하냐'고 볼멘 소리를 하든 말든, 그는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화장실 청소라는 듯 드러누워도 될 만큼 깨끗하게 만든다.

영화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의 일과 그 밖의 시간들을 그려낸다. 목욕을 하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주말이 되면 새로운 책을 찾아 헌책방을 들르고, 단골 주점을 찾는, 그 일상들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되풀이되는 루틴으로 채워진 일상의 삶에 사람들이 오간다. 젊은 청소부와 그의 애인, 점심 시간에 나란히 앉아 편의점 도시락을 먹게 된 젊은 여성, 그 맞은 편에서 전위 예술같은 행위를 선보이는 노숙자, 그리고 그의 과거를 엿보게 만드는 조카의 등장, 거기에 시한부라는 단골 주점 여주인의 남편까지. 그들은 마치 강물처럼 히라야마의 삶을 에돌아 흘러 지나간다. 일터와 그 밖의 삶, 그리고 오고 가는 인연들로 영화는 직조된다. 우리네 삶이라고 무에 그리 다를까.

하지만 히라야마의 매일은 빛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햇살이 그를 반기고, 히라야마는 문을 열고 나서면서 미소를 짓는다. 점심 시간, 나뭇잎 사이의 햇살을 카메라에 담는다. 매일 새로운 태양이 뜨듯, 그 새로운 하루의 의미를 채워가는 건 결국 나뿐이 아닐까 하고 영화는 묻는 듯하다. '퍼펙트 데이'는 나의 선택이다.

'새로운 새벽, 새로운 하루, 새로운 인생이야. 나에겐 말이야'라는 노래 '필링 굿'의 가사가 흘러나오고, 눈물을 머금은 채 미소를 띠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히라야마. 어찌 됐든 우리는 또 새로운 날을 살아나가야 한다.

[리빙: 어떤 인생] 찬란한 마침표를 향해

 리빙; 어떤 인생
리빙; 어떤 인생넷플릭스

우리는 늙어감을 한탄하지만, 막상 그 늙어감의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천년만년 살듯이 하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주인공 빌 나이에게 런던비평가협회상 최우수영국배우상과 LA 비평가협회상 최우수주연상을 안긴 <리빙: 어떤 인생>은 시계추처럼 정확하지만 판에 박힌 듯 습속에 젖은 공무원의 삶에 찾아온 원치 않는 변화의 이야기다.

1953년 런던시청 공공사업부 로드니 윌리엄스(빌 나이 분)는 어느 날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시한부의 시간이 허용됐다는데(?) 윌리엄스는 도리어 그 시간을 당기려 한다. 약을 잔뜩 사 들고 외진 바닷가를 찾은 그는 작가 서덜랜드를 만나 그의 인생에서 없던 '일탈'을 해본다.

밤늦은 시간까지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고, 그의 아내가 좋아하던 노래도 사람들 앞에서 호기롭게 불러보지만, 그런 일탈조차도 익숙지 않다. 가진 돈을 털어 무단 결근을 하고 비싼 레스토랑까지 다녀봤지만, 막상 그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보낼 일이 막막하다. 오죽하면 시청을 관둔 젊은 여성 직원에게 루틴처럼 가던 화요일 밤의 영화 관람에 함께 해 달라고 부탁했을까.

흔히 시한부 인생을 담은 영화들이 그간 해보지 않은 삶의 자유를 누리며 환희를 만끽하는 설정을 주로 다룬 반면, 고리타분한 공무원을 주인공을 삼은 <리빙; 어떤 인생>은 생각지 못했던 질문을 던진다.

평생 시청 공무원으로서 기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며 살아오기만 했던 로드니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놀이터 구석에 앉아 엄마가 부르기만을 기다리던 아이처럼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 고지식한 공무원에게 아름다운 마침표는 허락될 수 있을까?

로드니는 말한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그는 정장을 입고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일하러 가던 신사가 되고 싶었다고.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룬 셈인 것이다. 하지만 원치 않는 일이 자신에게 오면 다른 부서로 돌리거나, 그도 아니면 '해가 될 건 없으니' 식으로 보류나 하며 늙어갔다. 젊은 직원 해리스가 그런 그에게 '미스터 좀비'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시한부의 삶을 고뇌하던 로드니는 허락된 시간의 자유 대신, 허락된 시간의 도전을 택한다. 바로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살아있음의 시간이었다. 더는 시간이 없다며 로드니가 앞장 선 덕분에 전쟁 후 폐허가 된 공터가 어린이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 놀이터에서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며 로드니는 세상을 떠난다.

"어떤 목표를 위해 애쓰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날이 찾아온다면, 무엇보다 일상에 지쳐 오랜 시간 내 발목을 잡았던 그런 상태가 돼 당신도 움츠러든다면, 우리의 작은 놀이터가 완성된 순간 느꼈던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 보길 바랍니다."

극중에서 로드니가 남긴 편지다.

<퍼펙트 데이즈>나 <리빙: 어떤 인생>은 도쿄 청소부의 일상과 시한부의 공무원의 도전을 통해 '우리에게 허용된 건 충실한 오늘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가 살며 얻게 되는 건 저 멀리 있는 그 무엇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Over the rainbow'의 가사처럼 그곳을 향해 가는 오늘의 여정이 전부일 뿐이라고.

어느 새 2월 쏜살같이 달려갈 2025년, 당신의 한 해가 퍼펙트한 하루하루로 충만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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