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바다를 누비다 보면 심심찮게 보이는 '밈' 중 하나가 '역대 최악의 세대' 드립이다. 00년대생이 한반도 역사상 가장 불운한 세대라는 주장인데 댓글 창에는 당연히 반박이 무성하다. 절대로 결론이 나지 않는 이 드립에는 단 하나의 일관성이 있는데, 주장하는 시기는 다 다른 데도 모두가 자기가 속한 세대가 최악이라며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다. 그런 논지의 끝에선 자신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상상 속 황금시대가 설정된다. 그저 드라마나 '카더라'로만 접해본 과거가 자신들의 세대보다 월등히 살 만한 세월이라는 전제다. 실체 없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 세대논쟁과도 잇닿은 부분이다.

이는 우리만의 사정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구한 전통의 산물이다. 세계의 많은 신화에서 역사 이전 전설의 시대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으로 그려진다. 고통과 슬픔이 없고 운명을 의심하지 않으며 무한한 행복만 누리던 시대에서 어쩌다 보니 죽음과 수난 가득한 현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이나 제우스 이전 크로노스의 시절, 유사역사학으로 지탄받는 '환국' 시대 등은 모두 대동소이한 배경과 설정으로 이어진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동경하고 찬탄한다. 유일 초강대국의 성세를 구가하는 미국 역시 그런 열등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아무리 국력을 자랑해도 짧은 역사에서 오는 한계는 어쩔 도리가 없다. 유럽 이민자의 후손이 세운 나라인지라 특히 유럽 대륙에서 문화와 예술 강국인 프랑스에 대한 감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화끈하게 인정하고 선망하지만, 재수 없다며 위악적으로 무시하거나 비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설정상 '구세주' 네오에 앞선 존재로 그려지는 '메로빈지언'은 거들먹거리는 프랑스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총합처럼 그려진다. 한때 미국-프랑스 관계가 안 좋던 시절, '프렌치프라이' 개명 논란처럼 모든 미국인은 프랑스에 대한 상반된 감정으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한편, 프랑스 문화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며 흠모하는 부류도 적지 않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런 입장이 이상화된 대표적 예시다.

◆ 황금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

할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 길은 약혼자 이네스와 함께 파리에 도착했다. 예비 장인과 장모의 일정에 동행한 것이다. 평소에 파리를 동경하던 길은 처음엔 무척 즐거운 여행이라 생각했지만, 사랑스러운 약혼자와 파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의외로 곤혹스러움의 연속이다. 길은 틀에 박힌 영화 대본 작업 대신에 작가로 전향하고 싶다. 첫 장편 초고를 여행지에서도 계속 들여다보고 고치는데 열중하는 그와 달리 이네스는 관광과 파티에 여념이 없다. 조용히 여유롭게 파리를 즐기고픈 길과 시간에 쫓겨가며 스탬프 투어 돌 듯 바쁘게 재촉하는 이네스 사이엔 평소에 발견하지 못한 갈등이 점점 쌓여간다.

역시 저녁에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러 가겠다는 이네스와 헤어져 홀로 밤거리를 산책하던 길은 어느 골목 계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참이다. 시계가 12시를 땡 하고 울리자 클래식 카가 자기 앞에 멈추고 낯선 손님들이 함께 파티에 가자며 손짓한다. 엉겁결에 그들과 동행한 길은 1920년대의 파리, 본인이 동경하던 황금시대 속으로 빨려든다. 처음엔 당황스럽지만, 이내 상상만 하던 위대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감격할 따름이다.

이제 길은 약혼녀와 떨어져 밤만 되면 홀로 파리 골목을 산책하다 자정이 오기만 기다린다. 그 장소에서 대기하면 의문의 차가 도착해 자신을 황금시대로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스콧 피츠제랄드와 그의 아내 젤다가 손을 내밀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파블로 피카소가 그를 맞이한다. 초보 소설가인 길은 위대한 문호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고 조언을 듣는 행운에 감격한다. 소설 초고에 대한 품평은 심지어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받게 된다. 이제는 그저 파리에 계속 머물러 그들과 꿈 같은 교류를 이어가고 싶기만 하다.

시간여행 와중에 길은 피카소의 모델이자 연인, 헤밍웨이가 한눈에 반한 아드리아나와 대면한다. '만인의 뮤즈' 그 자체인 아드리아나에게 길 역시 매료된다. 현재의 약혼녀에게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길은 반대급부로 자신이 이상화한 시대의 뮤즈에게 끌릴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현실과 과거가 서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아드리아나는 길에게 결혼을 예정한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길은 시대를 초월해 1920년대에 정착하고 싶다. 과연 시간여행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 파리의 문화예술 황금시대를 활동사진으로 복원하다

아무리 돈을 들여 파리 관광 홍보영상을 찍는다고 해도 이렇게는 나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만큼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 세계적인 도시가 품은 풍요로운 문화예술 유산을 영화 내내 소개하는데 할애한다. 작정하고 파리의 풍경을 그림처럼 담겠다고 거장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감독이 소매를 걷고 나서니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만큼 영화 속 파리의 낮과 밤은 인생에 한 번쯤 꼭 방문하고 싶어지는 이 도시의 정수를 구현하는 데 할애된다.

하지만 거장의 심미안으로 응시하는 파리는 관광안내책자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약혼녀와 그 친구들이 우당탕 몰려다니는 파리와 길의 파리는 전혀 다른 각도로 그려진다. 특히 현학적이라는 용어를 형상화한 것만 같은 이네스의 지인 폴과 길의 충돌이 대표적인 예시다. 주인공이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파리에 대해 경의 섞인 찬사를 주고받을 때 순전한 기쁨과 달리 폴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칭송하는 걸 당연시하며 흠뻑 즐긴다.

하지만 전문가의 시선에서 폴이 늘어놓는 말들은 허점투성이에 다른 데에서 긁어모은 잡학 수준에 불과하다. 길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실제로 교류하며 폴의 허실을 논파할 '진실'과 접하게 된다. 하지만 폴을 추앙하는 약혼녀와는 그로 인해 더 사이가 벌어지게 되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진실에 도달할수록 더 많이 보이고 당연히 거짓과 허실을 용납할 수 없으니 말이다. 파리라는 도시와 그에 함축된 가치를 겸허히 수용하려는 이와 과시형 보여주기에 그치는 이 사이엔 타협점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예술사를 애호하는 이들이라면, 낭만적인 배경음악과 함께 봇물 터지듯 주인공 앞에 등장하는 예술 거장들 앞에서 탄성을 삼킬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믿을 수 없다며 멍한 표정을 지을 때 관객 또한 길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왜 2010년대라는 천박하고 재미없는 시대를 살아야만 하나 늘 한탄하던 길이 자신이 이상화한 시대의 존경하고 선망하던 예술가들과 실제로 어울리는 행운이라면 누구라도 부럽지 않을까? 피카소의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과 작품에 대한 실제 배경 해설, 수많은 호사가의 구설 속에 파묻힌 대작가의 사생활 확인을 눈으로 누리는 기회라니 말이다. 무엇보다 그런 천재들이 서로 물고 물리며 영감을 주고받는 시대의 분위기를 호흡하는 건 아무리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노릇이다.

길은 이제 아예 1920년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갈수록 속물 행각이 두드러진 2010년대 약혼녀 대신에 아드리아나와 서로 마음을 확인했으니 정착하고 싶다. 모든 게 완벽한 시대, 자신이 가진 미래지식으로 루이스 브뉴엘에게 영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피카소의 그림과 만 레이의 사진을 실시간 접하며 살바도르 달리에게 캐리커처를 받게 되는 꿈 같은 시절이라니. 황금시대의 일원이 된다는 생각만 해도 짜릿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행운아 길이다. 그렇게 행복한 과거 회귀를 결심한 길과 연인이 된 아드리아나 앞에 자정이 된 시각 '앤티크'한 마차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 지금 현실에 충실하라는 교훈

영화는 길과 아드리아나를 '벨 에포크' 시절로 데려가면서 그저 문화도시 파리에 대한 찬사를 벗어나 삶의 교훈을 설파하는 성찰로 전환한다. 길은 1920년대, 자신이 상정한 황금시대에 더없이 만족하지만, 1920년대 사람인 아드리아나는 오히려 한 세대 전인 19세기 후반의 좋았던 옛 시절을 희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벨 에포크의 파리 속에서 고갱과 드가, 로트렉을 만나고 코미디 프랑세즈의 공연에 환호하지만, 정작 고갱과 드가는 자신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길은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초현실적 기회를 통해 삶의 교훈에 도달한다. 성공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서 아무것도 보장될 리 없는 신인 소설가로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팠던 일에 도전하는 중이지만,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은 일인지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던 길은 1920년대와 벨 에포크, 그리고 르네상스로 거슬러 가는 초현실적 체험을 통해 "향수는 고통스런 현실의 도피"라는 깨달음에 비로소 도달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과거의 위대한 '황금시대'를 희구하며 (각자) 현실의 한계를 탈출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기만의 침잠에서 객관적 예시를 목격하는 것으로 극복하게 된다.

과거를 이상화하던 길은 마침내 100년 전이 페니실린이 없던 시대라는 것을 기억한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21세기를 사는 관객이 냉장고도, 에어컨도 없는 조선 시대 왕의 삶을 동경하는 건 어불성설인 것처럼 말이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휴대전화 몇 시간만 떨어져 있어도 견디지 못할 이가 태반이다. 요즘 극장에서 긴 영화 보는 걸 힘들어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결국 돌고 돌아 현재로 돌아온 길. 겉으로 그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잃어버린 게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관객은 비 오는 밤 파리 거리에서 행복해하는 주인공의 표정에 함박웃음을 곁에서 함께 짓게 될 테다. 유서 깊은 대도시라면 파리가 아니라도 공간에 배어 있는 역사와 그곳을 살던 이들의 기억이 가득한 보물창고라는 것을 간파하듯, 이 영화는 파리라는 세계문화유산을 더없이 황홀한 눈요기로 즐겁게 해준다. 근현대 예술사 가이드는 그저 거들 뿐이다.

<작품정보>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미국|로맨스, 판타지
2025.02.12. (재)개봉|94분|15세 관람가
감독 우디 앨런
출연 오웬 윌슨, 마리옹 꼬띠아르, 레이첼 맥아담스 외
수입 ㈜엔케이컨텐츠
배급 ㈜디스테이션
미드나잇인파리 우디앨런 오웬윌슨 마리옹꼬띠아르 레이첼맥아담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