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신뢰할 만한 정치인이 있을까. 삿대질하며 싸우는 이들이 알고 보니 '호형호제'하는 사이고, 가슴 찡한 연설이 '보여주기용'이란 사실은 알면서도 매번 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치인이 헷갈린다. 불러줘서 영광이라며 눈 인사만 까딱 하고, 감동적인 사연을 들으면 "팔릴 만한 스토리"라 말하고, 좋은 정책을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수행한다. 물론 능력도 없으면서 심성까지 못된 정치인보다 낫지만, 그 미소가 어딘가 꺼림칙하다. 남성 캐릭터들이 삶과 죽음을 오갈 때 홀로 선과 악을 오가는 여성,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 속 '강명희(김선영)'를 진찰할 시간이다.
여자 정치인의 능력
▲<중증외상센터> 스틸컷
넷플릭스
화려한 언변으로 발을 집어넣을 때와 꼬리 뺄 때를 아는 '정치인' 명희는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차기 대권주자다. 그는 취임 당시 "이 땅에 더는 무력한 죽음이 없도록 약속하겠다"고 했지만, 현재는 의료 시설 미비로 반복되는 사망 사고에 언론사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래서 1화부터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병원장들을 모아 거세게 추궁한다.
그는 책상을 거세게 내리치며 병원장들을 향해 "왜 이거밖에 사람을 못 살리냐, 돈값을 하라"고 열변을 토한다. 고함을 지르며 손가락질하는 명희와 달리 병원장들은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모른다. 다른 장면에서 의사들과 병원 직원들을 하대하던 병원장들이 그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명희가 가진 권력의 크기를 체감하게 한다.
그는 "멀리서 훌륭한 분을 모셔 왔다"며 '강혁(주지훈)'을 외상센터에 꽂고, 굳이 임명식까지 행차한다. 갑작스러운 인사 채용에 "낙하산 아니냐"며 불평불만을 쏟던 교수들도 명희의 입장에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낸다. "센터가 왜 이 모양이냐, 이곳에서 일하게 된 나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강혁의 발언에 모두가 술렁일 때도 명희는 흔들림 없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강혁에게 기회를 달라며 난장판인 임명식을 끝낸다.
명희는 적재적소에 권력을 이용한다. 강혁을 방해하는 원장을 찾아가 "지금 압력 주는 거 맞다. 내 말귀를 알아들으라"고 하고, 몰래 소방헬기를 띄우지 않은 소방청장을 불러내 심문한다. 거침없는 강혁조차 자신의 수세가 몰릴 때면 "장관님께 전화해서 말씀드리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할 정도다. 동시에 '정치인'답게 자신의 공로가 주목받을 수 있도록 꼬박꼬박 기자회견을 열어 강혁을 자랑하고, 그를 뽑은 자신을 어필한다.
그러다 강혁의 채용에 비리가 있다는 제보가 터지고, "차기 대권주자 행보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뉴스가 쏟아진다. 모두가 당황한 순간에도 명희는 입꼬리를 올린다. 되려 강혁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를 둘러싼 부정적인 이슈를 정면 돌파하자"고 남수단에 가서 피격된 군인을 살려오라고 명령한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강혁이 금의환향하는 순간에도 명희는 기자들 앞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이룬 성과를 깨알같이 언급한다.
<중증외상센터>의 흐름을 좌우하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완벽한 주인공 강혁, 그의 1호 제자인 재원(추영우) 그리고 그들을 시기하는 교수들까지 남성 캐릭터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서사가 완성된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정치인으로서, 권력자로서 모두를 발치에 두고 이용하는 명희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된다.
강인함 드러내는 천장미
▲<중증외상센터> 스틸컷
넷플릭스
모든 능력을 타고난 주인공이 막힘없이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 '먼치킨' 장르에서 메인 캐릭터는 성별이 주로 남성이다. 한국 작품으로 <모범택시>·<빈센조>·<열혈사제> 등이 있는데, <중증외상센터>도 그 길을 이어받았다. 다른 작품에 비해 8화라는 짧은 회차에도 불구하고 <중증외상센터>는 초반부에 캐릭터성을 확고히 한다. 드라마 후반에서는 각 캐릭터를 알차게 풀어내 시청자 입장에서 캐릭터를 음미할 수 있게 한다.
빼곡한 남자 캐릭터들 속에서 빛을 발휘한 캐릭터 중에 '천장미(하영)'도 있다. 중증외상팀 5년 차 시니어 간호사인 그는 위기 상황에서 빠른 판단으로 재원을 다잡고, 강혁이 미처 보지 못한 지점까지 포착한다. 또한 수술실에서 자신이 간호사라는 이유로 하대하는 의사에게 맞서면서 환자를 지키기 위해 다시 평정심을 잡는다.
강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뻔뻔함을 밀고 가고, 재원은 의사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캐릭터라면 장미는 일관되게 강인한 천성을 유지하는 캐릭터다. 어찌 보면 남성 캐릭터들의 서포터로서 전형적인 여성의 역할에 갇힌 듯하다. 하지만 장미는 일방적으로 강혁과 재원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술을 이끌어가는 팀원으로서 기능한다. 그럼에도 감초는 감초, 메인 요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의료 파업 이후로 잠잠했던 메디컬물에 <중증외상센터>가 숨을 불어넣었다. 넷플릭스 TV쇼 부문 글로벌 2위에 올랐고(1월 31일 기준) 총 19개국에서 1위를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모으고 있다. "신이시여, 저만 믿으소서"라고 기도하는 백강혁의 합리적인 나르시시즘, 그리고 그런 그를 은근히 이용하는 명희와 장미의 조합은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백미다.
▲<중증외상센터> 메인 포스터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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