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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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런 상상을 했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다 나간 뒤 나만 안 나가고 객석에 앉아 있다. 누군가 다가와서 '손숙 선생님, 연극 다 끝났어요'라고 하면 나는 이미 떠나 있었다. 그 순간이 내 생의 마지막인 거다. 무대에서 못 죽으면 객석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복이다. 그렇게 가는 것이야말로."
배우계 두 거장의 '웰다잉'에 대한 성찰이 시청자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했다. 지난 29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는 원로배우 박근형과 손숙 선생이 출연해 자신들의 연기 인생을 전했다.
연극계의 고전인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박근형과 손숙은 연기 경력만 둘이 합쳐 124년에 이르는 대한민국 배우계의 살아있는 전설들이다. 오랜 연기 경력에도 두 배우가 연극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노장배우 박근형이 매순간 치열할 수밖에 없는 이유
박근형과 손숙이 공연 중인 <세일즈맨의 죽음>은 산업화 시대의 평범한 세일즈맨이 산업화 시대에 가정을 이끌어가다가 가족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한 회당 공연 시간만 무려 170분에 이르며 어마어마한 대사량으로도 유명하다.
손숙은 "박근형 선생과 이번에 처음 연기했는데, 성질이 조금 X랄 같더라"며 갑작스러운 돌직구를 날려 모두를 포복절도하게 했다. 알고 보니 "작품을 너무 열심히 하더라. 우리가 젊을 때 연극하던 그 정신을 아직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칭찬의 의미였다. 손숙은 "무대에서 박 선생님 눈빛만 봐도 설레고 짠하다. 그런 배우 만나기기가 쉽지 않다"며 재차 극찬했다.
박근형은 "세월이 얼마 안 남았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너무 급하다. 보여주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라며 매순간 더 치열하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손숙은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는걸 못 느끼겠더라. 어느새 연기 인생 60년, 나이 팔십 이러니까, '뭐야 이거?' 라는 생각도 든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나이 들어서 좋은 점도 있다. 일단 편안해지고, 끓던 감정이 좀 가라앉는다. 욕심도 내려놓게 된다"고 했다. 그는 "연극에서는 주인공만 맡았는데 어느 날부터 할머니 역할이 들어오더라. 그러다 보니 '아, 내려놓자' 싶었다"면서 "마냥 주인공만 고집하면 추하겠다 싶었다. 이 나이에 멜로 드라마 주인공을 주겠나. 이제는 어떤 역할이든 별로 안 따지고, 한두 신이라도 한다는 게 재밌다"고 고백했다.
시대의 명배우들에게 세월의 흐름은 속일 수 없었다. 손숙은 본래 독서광일 만큼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황반변성이 와 시력이 크게 나빠지며 글씨를 전혀 읽을 수 없게 됐다. 대본을 보고 대사를 외우며 캐릭터를 이해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문제였다.
당시 손숙은 "하느님이 왜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빼앗아 가셨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며 힘들었던 순간을 털어놓았다.
이어 "딸이 저한테 (대본을) '듣기'를 권하더라. 딸이 대본 한 권을 다 녹음해줬다. 저녁마다 누워서 대본을 들었다. 처음엔 못하겠다 싶었는데, 계속 듣다가 한 일주일쯤 되니까 대사가 외워지더라"며 시력 저하도 막지 못한 연기 열정을 털어놓았다.
박근형은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연기노트'를 작성하던 습관을, 어느덧 80대의 대배우가 된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었다. 그는 "연기를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왜 이 사람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가'라는 타당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노하우를 전하며 "실제 연습에 들어가면 대본을 2-3백 번은 읽는다"고 했다. 박근형이 공개한 연기노트에는 장면마다 철저하게 대사를 분석하고 세밀한 동선까지도 꼼꼼하게 체크해놓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불꽃같이 무대에서 다 태워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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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손숙은 아날로그 세대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울 만큼 급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도 고백했다. 그는 "요즘 세상 재미 없다. 너무 빨리 변해가니까. 우리 같은 노인들은 정신이 없다. 커피 한잔 마시러 가도 온갖 버튼을 누르라고 하고, 나는 눈도 잘 안보이는데"라며 "조금은 천천히 가면 좋겠다. 천천히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박근형 역시 "그런 기계(키오스크)만 보면 그냥 되돌아가게 된다"며 노년 세대의 고충에 공감했다.
어느덧 두 노배우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며 서서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생각해야 할 시기를 맞이했다. 박근형은 연극의 명대사를 인용했다.
"우습지 않아? 기차 여행, 고속도로 여행, 그 수많은 약속... 오랜 시간 그것들을 다 거쳐서... 결국은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됐으니 말이야." -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중에서
그러면서 그는 "살면서 한 수많은 일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의미를 남기려 자꾸 기록을 남기고 싶은 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그 대사가 제 마음에 와 닿는다"고 이야기했다.
박근형은 '버림의 미학'을 강조하며 본인의 사후를 대비해 자신이 평생 간직해온 수많은 사진과 자료들을 미리 정리해놓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처음에는 연극 대본이나 추억이 되는 사진들을 보면서 나중에라도 자료로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정리를 하자고 결심하고 용감하게 다 잘라 없애버렸다"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고 홀가분하게 가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흔적들을 한순간에 모두 소각하고 폐기하려는데 망설임은 없었을까. 박근형은 "솔직히 아깝다"고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무리 나한테 귀하고 좋아도 자식들에게 챙기고 간직해달라기는 어렵다. 내 세대는 내가 정리하고 가는 게 맞다. 세대는 자꾸 돌아가는 거니까 내 기록을 남기자고 고집할 이유는 없다"며 삶의 흔적에 초탈한 면모를 드러냈다.
손숙 역시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했다며 "사람이 죽으면 유품 정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저희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면서 "고 이해랑 선생(배우 겸 연출가)이 '연극배우는 불꽃같이 무대에서 다 태워라.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하시더라. 그 말이 참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기고 싶지 않다. 남겨서 뭘 하겠나"라고 전했다.
박근형과 손숙이 생각하는 '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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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과 손숙은 평소에도 '웰다잉'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고. 손숙은 "우리 나이가 몇인데, 내일 갈지 모레 갈지 모른다. 팔십 넘으면 산에 누운 사람이나 안방에 누운 사람이나 똑같다고 하더라"고 백전 노장들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을 던졌다.
이미 사후 영면에 들 곳도 예약해놓았다는 손숙은 "요즘 웰다잉에 관심이 많다. 딸과 어느 성당에 갔는데 새로 만들었다는 납골당이 깨끗하고 환해서 마음에 들더라. 그래서 분양을 하나 받았다"면서 "시간 날 때마다 '우리 집 잘있나' 한번씩 가본다. 관리인에게 '늦게 와서 죄송해요' 농담을 했더니 '천천히 오세요'라고 하더라"며 미소를 지었다.
두 노배우는 모두 요즘은 연기를 하는 게 가장 행복하고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고백했다. 박근형은 "앞으로 4-5년 더 연기한다고 계산해도 열 작품도 하기 힘드니까, 몇 개만 더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니까 마음이 급해진다"며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손숙은 "아직까지는 대사 외우는 게 괜찮은데 언제쯤 기억력이 약해질지... 그땐 대사 없는 역이라고 달라고 해야지 라고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두 노장은 자신들이 깨달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정리했다. 박근형은 "젊었을 때는 욕망과 욕구를 위해 달리니까 정신 없던 시절인데, 나이 먹어서는 남들이 나를 불러주는 것, 잊지 않고 나를 배려해주는 것을 나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손숙 역시 공감하며 "그러려면 잘 늙고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은 진짜 아닌 것 같더라. 그렇게 살다가 깨끗하는 게 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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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픈 게 너무 많은데..." 80대 노장 배우의 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