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 스틸컷
판씨네마㈜
03.
"거기 어딘가에 있는 거지? 보고 싶었어."
에바의 사고 소식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영화는 이들이 왜 죽었는지와 같은 사정을 설명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남겨진 이들의 마음이나 행동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어서다.
당사자들이 알 수 없는 현상 앞에서 거부감을 느끼거나 당황하지 않는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 모두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감정적으로 놀라할 뿐, 그것조차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가진 하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언데드가 된 그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앞서 언데드가 된 존재들의 귀가가 그들을 잊지 못한 채로 남겨진 이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것이 되살려 붙잡을 수 있는 따뜻한 종류의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어떤 기회는 주어질 때부터 꼭 붙은 손가락 사이 틈새로 흘러 나갈 것임이 확정된 상태로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다음 날, 사라져 버린 공동묘지 시체들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경찰들의 모습만 봐도 이들 존재와의 관계를 복원할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공권력의 눈을 피해 다시 잃지 않고자 하는 쪽으로 향하는 다른 두 가족과 달리, 처음부터 병원에 아내를 맡겨야 했던 데이빗 가족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이 영화의 문제는 주어진 기회에 대한 면밀한 판단이나 상황적 이해 없이 맹목적으로 뛰어든다(Dive-in)는 점에서 시작된다. 자신들의 품으로 돌아온 존재들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그들과 함께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삭제돼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간선과 세계에도 미디어를 통한 언데드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가정 속에서 이들의 행동은 이성적이지도 옳지도 않다.
이 문제를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는 이유는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을 만큼, 상실에 대한 슬픔과 망자에 대한 그리움은 클 수밖에 없다는 것. 일상 속에서 마냥 멈춰 설 수 없는 우리 대신 영화가 그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다.
04.
그렇지 않은 작품이 몇 있기는 하나, 대개의 경우 장르적 활용을 위해 기존의 인식을 비트는 모습을 보여왔기에 이 작품이 좀비, 언데드라는 대상을 활용하는 방식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언제나 죽은 존재는 우리 모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그것도 모자라 해치려는 의지를 가진 대상임이 가정된 상태로 이야기가 시작되곤 했다. 존재만으로 적대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 설정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동일한 설정이 활용되곤 있다. 사람을 향해 입질을 하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생명체를 아무런 감정 없이 죽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이들의 본질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전까지 영화는 이를 극의 구조화를 위해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언데드라는 대상이 가진 성질은 대상에 대한 경계와 환기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작용될 뿐, 소비되지 않는다. 한쪽에서 일순 상쇄해 버린 적정한 거리를 다시 떨어뜨림으로써 그사이의 존재적, 관계적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결국 이 영화가 자신 앞에 앉은 관객들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언데드화 돼 의식도 없이 시체인 상태로 돌아온 순간과 삼키지 못한 마음으로 그를 끌어안고자 한 이가 다시 그들로 인해 믿음을 배반당하기까지의 두 시점 사이에 존재한다.(인간이 그 대상에게 가진 감정에는 어떤 의미를 둘 수 있을까. 살아있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생생한 감정일까. 살아 있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는 미련함일까.) 어느 쪽으로도 도망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갇혀버린 물음은 이를 지켜보는 이들까지도,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그 선택을 쉽게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 스틸컷판씨네마㈜
05.
죽어서도 그 사랑을 놓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던 이를 스스로 물어뜯는, 그런 후에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와 그런 대상을 피해 도망치면서도 그 품속에 여전히 망자인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이의 모습에 양가의 감정이 모두 그려져 있는 듯하다.
물론 그 자리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이제 끊어진 관계와 존재에 대한 감정은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 하나다.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다루는 법'의 대상인 '언데드'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아직 채 갈무리되지 못한 남겨진 이들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만나, 사랑해."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접히고 포개지지 않는 마음의 미련을 한 줄의 문장 속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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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