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는 과거부터 최근까지 종종 역사의 결정적 장면에 등장한다. 왕권강화 수단으로 좀 다른 방식의 정치적 행보를 보인 인물도 있다. 태종 이방원이다.
27일 tvN <원경> 제7회에 묘사된 양위(선위) 파동은 그가 '양위'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준다. 양위는 군주가 퇴위해 그 지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뜻한다.
이날 방송은 원경왕후 민씨(차주영 분)의 동생인 민무질(김우담 분)이 군무를 총괄하게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쌓였다. 민무질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대궐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방원(이현욱 분)은 양위 카드를 꺼냈다. 어린 세자(김건우 분)를 신하들 앞에 세워놓고 "내 위(位)를 세자에게 물리고자 한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방원은 실제 왕위를 넘길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다만, 양위 파동을 통해 권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양위 선언한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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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재위 기간에 최소 4차례에 걸쳐 양위를 선언했다. 공민왕 때인 1367년에 출생한 그는 15세 때인 1382년에 과거시험 소과인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했다. 그가 역임한 관직 중에 인상적인 것은 주상을 보좌하는 밀직사 대언(代言)이다.
<태종실록> 서두는 그의 프로필을 요약하면서 "경오년에 공양왕이 관직을 밀직사 대언으로 승진시켜 항상 근밀(近密)한 데 두었다"고 명시했다. 이성계의 실권이 공고해진 뒤인 1390년에 밀직사대언이 되어 공양왕의 최측근에서 신임을 받았다.
진사 출신들은 대체로 시를 잘 썼다. 그런 특성을 가진 이방원의 가장 인상적인 관직에는 언(言)이 붙어 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그는 말로 하지 않고 무력을 썼다. 붓 대신 칼을 끄집어내 위기에 대처하곤 했다.
정몽주는 처음에는 이성계의 쿠데타를 지지했지만, 이성계가 정도전과 함께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신왕조를 개창할 움직임을 보이자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그런 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요양하는 틈을 타서 이성계의 측근들을 탄핵했다.
이로 인해 이성계 진영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을 때, 이방원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폭력적 방식으로 정몽주를 없앴다(선죽교 사건). 25세의 선비 출신이 그런 과격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이방원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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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된 1392년에 그 일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이방원은 1398년에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1400년에는 그가 조작한 냄새가 나는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했다. 무인의 아들로 태어나긴 했지만 붓으로 일어선 인물이 번번이 칼을 휘둘렀다.
왕권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뒤에는 친위 쿠데타 같은 무력적 방식보다 양위 파동처럼 상대적으로 유순한 방식에 의존했다. 유혈을 동반할 수 있는 비상계엄 같은 방식에 기대지 않고, 양위 파동을 통해 정치판을 흔들어가며 목적을 달성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앞서 <원경> 7회에 묘사된 양위 파동이다.
훗날 양녕대군으로 불리게 될 장남 이제(李禔)가 세자가 된 것은 열 살 때인 1404년이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406년 9월 27일(음력 8.16), 군사권을 관장하는 좌군총제인 여성군(驪城君) 민무질이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날 상황을 기록한 태종 6년 8월 16일 자(음력)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은 처남의 사의 표명을 즉각 수용했다. 그러자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사직이 재가된 직후에 민무질의 휘하 무관 1백여 명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민무질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집단행동이었다.
민무질 진영은 민무질이 오랫동안 군정을 관장한 사실을 거론했다. 민무질만큼 군인들의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없으니 그 직에 그대로 두라는 것이었다. 민무질의 사의 표명이 과연 진의를 담은 것이었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민무질을 영웅시하는 듯한 무관들의 집단 행동은 해석에 따라서는 역모가 될 수도 있었다. 이는 군주의 군사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될 수도 있었다.
이방원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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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강렬한 이방원은 이 상황을 보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위 실록에 따르면, 그는 "여성(驪城)이 있다는 것은 알고, 유독 내가 있다는 것만 알지 못하는 것인가?"라며 무관들을 질책했다. 그는 신하인 민무질의 이름을 자신과 병렬시키며, 민무질에 대한 무관들의 충성심을 탓했다.
뒤이어 이방원은 주모자를 체포해 국문하라고 지시했지만, 곧 철회했다. 그는 체포된 무관들을 모두 석방했다. 무관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신중 모드로 돌아섰다.
그런 뒤에 양위를 선언했다. 위 실록의 음력 18일 자 기록은 이방원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표명했음을 알려준다. 양위 선언이 민무질 때문에 나왔다는 직접적 기록은 없지만, 왕권과 직결되는 군사권 문제 때문에 임금과 민무질 진영이 충돌한 직후에 나왔으므로 두 사안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방원은 41세였다. 신하들은 군주가 젊고 세자가 어리다는 점을 들어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됐으니 바꿀 수 없다"고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계속 만류하자 "꼭 오늘 넘겨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서면서 "내가 다시 생각해 볼 테니 경들은 물러가라"고 청했다.
다음날이었다. 전날 양위를 선언했던 이방원은 19명에 관한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음력 19일자 <태종실록>에는 "여성군 민무질을 군권에서 해임했다"는 구절이 중간쯤에 들어 있다. 16일에 재가했다가 논란을 일으킨 민무질 해임 건을 이날 명확한 것이다.
이방원의 양위 선언은 8일 만인 10월 7일(음력 8.26) 철회됐다. 이방원의 왕권에는 변동이 없었고, 민무질의 군사권에만 변동이 있었다. 이 양위 파동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든, 그 와중에 민씨 가문의 군사권이 약해지고 이방원의 군부 장악력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칼이 아닌 말로 권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 시기 이방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양위 파동은 숙청과 정계 개편을 동반할 때가 많았다. 예전에 피를 많이 묻혔던 이방원은 왕이 된 뒤에는 양위 파동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피를 덜 묻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툭하면 칼을 빼 들었던 이방원도 임금이 된 뒤에는 쿠데타 방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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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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