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며 B급 장르 영화로 치부되던 판타지물을 블록버스터의 총아로 군림하게 만든 건 21세기 초다. 1년마다 극장가에 돌아오던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 놀음에 그친다는 비판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이 '전설이 아니고 레전드' 급 연작은 대중문화 상식이 되었다. 한동안 두 시리즈 중 누가 더 우위인가를 놓고 치기 어린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각각 2001-2002-2003년 개봉되며 마무리됐지만, 재개봉과 특별상영이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극장에서 가장 크고 특수효과 구현이 뛰어난 상영관에서다. 역설적으로 이후 제작되는 판타지 영화들은 하나 같이 '반지의 제왕에 필적하는' 혹은 '반지의 제왕 이후 최고의'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운명을 겪는다. 그만큼 난공불락의 전설이 된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도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같은 성공적 시리즈와 비교하면 <반지의 제왕>은 유독 파생작품이 적은 편이다. 실사영화 3부작을 연출했던 피터 잭슨에 의해 10여 년이 지나 원작 소설의 전작 <호빗>을 각색한 3부작, 그리고 아마존 프라임이란 거대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이 야심 가득 기획한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 드라마 1/2시즌이 전부다. 그만큼 '반지의 제왕'이 갖는 무게감이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J.R.R. 톨킨의 원작이 서구에선 워낙 거대한 인기작이라 열성 지지층의 성이 차지 않으면 쏟아질 비판이 상당한 몫을 차지한다. 지금이야 만인의 칭송을 받지만 심지어 피터 잭슨이 첫 3부작 영화화에 나설 때도 거센 비난과 의혹에 휩싸였을 정도다. '톨키니스트'들이 일치단결해 원작 훼손을 저지하는 노고에 박수를 보내다가도 간혹 좀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시도를 보고 싶을 때가 있지만, 거대 자본을 투입한 드라마 시리즈에도 혹평이 쏟아진 터, 비상한 각오와 노력 없이는 역시 도전하길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그야말로 본격 외전이 등장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이라 한다. 궁금하지 않은가.

반지원정대에서 200여 년 전 이야기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실사영화 3부작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두 개의 탑> 주 무대이자, 악의 세력에 맞선 반지 전쟁에서 가장 혁혁한 용맹을 떨쳐 많은 팬을 모은 인간 국가 '로한'이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배경이다. ('로히림'은 로한의 백성) <두 개의 탑>에서 드러나듯 광활한 평야를 배경으로 말과 함께 사는 기마민족 로한은 용맹으로 유명한 '헬름' 왕의 통치 아래 있다. 헬름 왕에겐 '할레스'와 '하마' 두 왕자, 그리고 딸 '헤라'가 있다. 든든한 오빠들이 있기에 헤라는 왕위 계승과는 무관하게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왕족에겐 헤라가 꿈꾸는 삶이 허용되지 않게 마련. 공주의 혼인 역시 정치의 문제다. 헬름 왕은 로한의 동맹국 '곤도르'와 외교 차원의 결혼을 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정해 둔 상태다. 거기에 예민한 문제가 끼어든다. 반 독립적인 대영주 '프레카'가 자기 아들 '울프'와 헤라의 결혼을 요구하며 도성에 나타난 것이다. 로한 왕국은 이주민 '로히림'과 원주민 '던랜딩'이 오랜 분쟁 끝에 타협한 체제라 정치적 불안정에 놓인 상태다. 국력이 더 강한 곤도르와 결혼으로 동맹을 강화하는 것에 국론은 분열되고, 원주민 세력을 대표하는 프레카의 요구는 쉽게 내치기 힘든 사안인 것이다.

헬름 왕은 그런 국내 정치 구도를 믿고 자신에게 불손한 대영주의 요구를 거부한다. 프레카는 왕을 매도하며 공공연히 반역을 내비친다. 참다못한 왕은 프레카에게 결투를 청한 끝에 상대를 때려죽이고 만다. 울프는 부친의 복수를 맹세하며 추방당해 사라진다. 누구도 이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변경에서 불길한 소식이 연달아 들려온다.

복수귀가 된 울프는 로한에 불만을 품은 변방 원주민 '던랜드' 부족을 규합해 준비를 마치고 로한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용병을 포함한 대군의 공격에다 사전 공작에 의한 영주들의 배신으로 로한 군대는 허무하게 패배한다. 막대한 희생과 함께 수도 에도라스가 함락당하고, 두 왕자도 전투 과정에 모두 잃는다. 절망에 빠진 헬름 왕과 백성은 피난처인 나팔 산성으로 퇴각해 농성하지만, 혹한의 겨울에 고립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헤라는 지친 이들을 격려하며 어릴 적 친구인 울프에 맞선 최후의 전투를 벌일 운명이다.

외전의 팬 서비스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원작 집필 순서와 연대기 시간대로는 훨씬 앞이지만 영화화는 뒷순위가 된 <호빗> 3부작을 본 이들은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에 기묘한 감각을 체험한다. 같은 작가의 연작이지만, <반지의 제왕>이 거대한 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라면 <호빗>은 청소년용 단권에 불과하던 분량을 억지로 확장하면서 시리즈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로히림의 전쟁> 역시 그런 구도의 연장선이라 하겠다.

<호빗>은 그나마 장편소설 1권 분량은 되지만, <로히림의 전쟁>은 그야말로 몇 쪽 분량에 불과하다. <반지의 제왕> 원작은 3부작 영화가 취한 구성처럼 <반지원정대>, <두 개의 탑>, <왕의 귀환> 3부로 구분되고, 방대한 세계관과 배경을 해설하기 위해 그 자체로 1권 분량을 차지하는 [부록]이 딸려 있다. 부록 편에는 이야기 속 주요 세력의 간략한 과거 역사와 계보, 그들의 언어들이 설명된다. <로히림의 전쟁> 기본 내용은 바로 그 부록 속 로한 왕가의 역사 중 한 장에 불과한 셈이다.

<두 개의 탑>에서 가장 핵심인 사건은 악의 진영으로 변절한 마법사 '백색의 사루만'이 이끈 '우루크하이(거대 오르크)' 대군에 맞선 로한의 전쟁이다. 불리한 전세에 밀린 로한 군은 나팔 산성 요새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인다. 요새는 과거 헬름 왕이 용전분투하며 함락을 면한 왕조의 성지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언급되던 전설이 <로히림의 전쟁> 배경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적대하는 세력 구성과 전투 양상 등에서 모두 <두 개의 탑>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 전작을 본 이들이라면 마치 <두 개의 탑> 애니메이션 판을 보는 기분이 자연스럽다. 이는 반가운 동시에 매너리즘으로 흐를 위험 요소다.

그런 전형성을 벗어나기 위해 제작진은 다양한 추가를 시도한다. 원작에선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개봉영화에 다 포함하기 힘들었던 부가가 시도된다. 지리적으로 로한과 인접한 중간계의 여러 지형과 생물을 등장시켜 원작 팬에게 흡족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실사영화에서도 시선을 잡아끌던 거대 코끼리 '무마킬'이나 모리아의 파수꾼 '크라켄', 지혜롭고 강한 거대 '독수리'의 등장은 반가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슬쩍 실사영화 시리즈와 링크 차원으로 끼워 넣은 '절대 반지' 떡밥과 '아이센가드' 요새의 소유권 분쟁까지 서비스 팁이 넘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재개봉한 <두 개의 탑>과 <로히림의 전쟁>이 겹쳐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적지 않은 대목에서 '복사해서 붙이기' 한 것처럼 동어반복 요소가 눈에 띈다. 사실 원작에서도 반지 전쟁의 주요 사건인 나팔 산성 전투가 '무쇠 주먹' 헬름 왕의 고사를 그대로 재현한 데 가깝다는 걸 고려하면, 오히려 선후가 뒤바뀐 경우이긴 하다. 마치 과일의 풍미를 재현한 메로나 아이스바나 바나나 우유를 먹은 이들이 나중에 진짜 과일을 맛본 뒤 메로나나 바나나 우유 맛이 난다고 평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격 스핀오프 시리즈의 출발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스틸 이미지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원작은 선악 대비가 확연하게 나뉘는 세계관이다. '골룸'처럼 연민을 불러오는 존재가 있지만, 그 외에는 거의 타협 불가능한 적대관계다. 하지만 로한과 던랜드 인의 관계는 복잡한 구석이 제법 된다. 실사영화는 현실 역사와 정치적 은유를 강화했지만, 역시 설명이 부족한 편었다. 이번 외전은 그런 목마름을 채워준다.

로한 vs. 던랜드 갈등은 원작자의 조국인 영국 중세사와 직결된다. 외부에서 이주한 로히림은 영국을 정복한 바이킹의 후예 노르만, 원주민 던랜딩은 켈트족 혹은 앵글로색슨 위치다. 소설과 영화 속에선 야만족으로 묘사되지만, 원작에서도 억울한 사연이 없지 않다. 로한 왕가와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프레카 영주 세력의 갈등은 곧 통합되지 못한 국가 내 민족 분쟁인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해당 요소를 헤라와 울프의 관계로 형상화한다.

이런 세계관 재해석은 상술한 난점 탓에 쉽사리 시도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작 규모를 적정히 통제하며 자유도를 부여한 덕분에 실타래 엉킨 것을 풀 수 있었다. 그렇다고 <로히림의 전쟁>이 원작과 실사영화를 도외시한 작업은 아니다. 피터 잭슨, 필리파 보웬스, 프렌 월시, 존 하우 같은 반가운 이름이 크레디트에 가득 등장해 연속성과 신뢰를 보증한다.

하나 더. 실사영화에선 '갈라드리엘' 역 케이트 블란쳇이 담당한 내레이션을 로한 역사물답게 '에오윈' 역 배우 미란다 오토가 맡는다. 드레스 곱게 입고 남자들 전송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말을 달리며 검을 잡던 '방패 여전사'가 자신의 선조를 기념하는 셈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해외에선 IMAX와 4DX로 공개되는 장대한 판타지 장면을 국내 개봉은 2D로만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첫 주자를 통해 그동안 꽁꽁 묶여 있던 외전 붐이 다양한 각도로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포스터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영화 포스터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작품정보>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
The Lord of the Rings: The War of the Rohirrim
2024|미국, 일본|애니메이션/판타지
2025.01.25. 개봉|134분|12세 관람가
감독 카미야마 켄지
출연 브라이언 콕스, 가이아 와이즈, 루크 파스콸리노
원작 J.R.R. 톨킨 [반지의 제왕] 부록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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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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