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 화면 갈무리
채널A <체크인 한양> 방송 화면 갈무리채널A

채널A <체크인 한양>의 주인공 홍덕수(김지은 분)는 동업자 천씨(천 방주, 김의성 분)에게 죽임을 당한 상인의 딸이다. 어릴 때 그런 일을 당한 홍덕수가 성장해 천씨가 운영하는 용천루라는 대형 여관에서 신분을 숨기고 일하는 과정을 이 드라마는 보여준다.

진짜 이름인 홍재온 대신 홍덕수라는 가명과 함께 남장여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홍덕수는 아버지의 옛 직원이자 용천루의 현 지배인인 설매화(김민정 분)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인 줄 알고 살았다. 홍덕수는 19일 방영된 제10회에 이르러 천 방주가 진짜 범인임을 알게 된다.

이는 천 방주의 공격을 당해 죽음 직전에 놓인 홍덕수의 양모가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을 홍덕수에게 알려준 결과다. 홍덕수의 양어머니는 천 방주가 홍덕수의 아버지를 죽인 일을 목격했다. 천 방주가 12년 만에 조우한 양모를 죽인 것은 그 때문이다.

죽음 직전의 양모로부터 진실을 알게 된 홍덕수는 설매화에 대한 오해를 푼다. 홍덕수는 자신이 진범을 알게 된 사실을 숨기고 천 방주를 아버지의 옛 동업자로만 대한다.

제10회 끝부분에서 홍덕수는 "어머님은 잘 모셨느냐?", "상 치르느라고 고단했을 텐데, 좀더 쉬고 오지 그랬느냐?"라며 가식을 부리는 천 방주 앞에서 "복수, 하고 싶습니다"라고 다짐한다. 친부와 양모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겠노라고 천 방주에게 밝힌다.

그런 홍덕수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25일 제11회의 두 장면으로 대비됐다. 설매화는 홍덕수가 다칠 것을 우려해 복수를 만류한다. "과거의 복수는 과거의 사람 몫이야"라고 말해준다.

반면, 또 다른 장면에서 천 방주는 복수를 응원한다. 홍덕수가 진범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홍덕수를 위하는 척 한다. 그는 "이제 내가 도와주마"라며 "니 아버지를 죽인 원수, 절대 용서하지 말거라"라고 말한다.

네 원수에게 참지 말고 복수하라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훌륭한 인격의 증거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또 사적인 복수는 그 사연이 아무리 절절할지라도 법적 용인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에서는 천 방주보다 설매화의 충고가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쉽다.

그러나 옛날 한국은 달랐다. 복수에 관한 공자의 가르침이 옛날 한국을 지배했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 따르면, 그는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무엇으로 덕을 갚을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나를 해롭게 한 원수에게 덕으로 갚게 되면, 내게 덕을 베푼 은인에게는 무엇으로 갚을 것이냐고 되물은 것이다.

그런 뒤 공자는 "곧음(直)으로써 원한을 갚고, 덕으로써 덕을 갚아야 한다"고 답했다. 원수에 대한 대응법과 은인에 대한 대응법을 차별화한 것이다. 원수의 행위로 빚어진 부조리를 올바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공자의 말이었다.

주자는 논어 해설서인 <논어집주>에서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은 후덕한 일이기는 하지만, 원한과 은혜를 똑같이 덕으로 갚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해야 두 가지의 갚음이 각기 제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자는 말했다.

복수에 대한 공자와 주자의 관점은 옛날 동아시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중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다. 오랫동안 일본을 지배한 무사(사무라이)들은 용서보다 복수를 미덕으로 삼았다. 옛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네 원수에게 참지 말고 복수하라'가 한국의 전통적 관념에 부합했다.

고려 제4대 주상인 광종은 호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공포 정치를 펼쳤다. 이 시대에는 신진 혹은 하급 관료나 호족의 노비가 호족들을 역모죄로 고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 정권이 호족을 탄압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로 인한 충격과 혼란을 수습하고 호족들의 마음을 사고자 제5대 경종 때 복수법이 허용됐다. <고려사> 경종세가 편에 따르면, 경종 즉위 초기에 최고위직인 집정(執政)을 맡은 왕선(王詵)에 의해 호족들의 복수가 허용됐다.

부모 위한 복수는 효도였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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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에 진상규명 같은 표현을 쓰겠지만, <고려사>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복수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경종세가는 복수를 명분으로 호족들의 보복 살상이 벌어졌다고 알려준다. 사적 복수가 금기시되지 않는 분위기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복수가 부모를 위한 것일 때는 형사처벌을 피함은 물론이고 표창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 영조임금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던 박효랑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영조실록> 및 <승정원일기>와 이익의 <성호사설> 등과 더불어 안석경의 <박효랑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건이 처음 발생한 것은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이 임금일 때인 1709년이다. 지금의 충북 괴산군 청안면인 청안현에서 현감으로 일하던 박경여가 경상도 성주 사람인 박수하의 선산을 침범했다. 박경여는 자기 할아버지의 묘를 박수하의 선산에 조성했다. 이 때문에 벌어진 분쟁에서 도리어 당한 쪽은 박수하다. 박경여의 친척인 관찰사는 피해자인 박수하를 하옥하고 곤장을 쳐서 죽게 만들었다.

박수하의 큰딸인 박문랑은 이에 격분해 박경여의 조부 묘를 파헤치고 숯을 피워 관을 태웠다. 이 소식을 들은 박경여가 장정 수백 명을 선산에 배치하자, 박문랑은 한층 강한 대응에 착수했다. 음력으로 영조 2년 12월 20일자(양력 1727년 1월 11일) <영조실록>은 "박문랑이 양손에 칼을 들고 곧장 말을 달려 산으로 올라가" 충돌을 불사했다고 알려준다. 이 와중에 박문랑은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둘째딸 효랑이 나섰다. 그는 신문고를 울리며 여론 조성에 착수한다. 그러자 경기·충청·전라·경상의 7천 유생이 그에게 동조했다. 그 결과, 박경여의 조부 묘를 훼손하고 그쪽 사람들에게 칼을 들고 달려든 박문랑의 행위는 국가적 칭송을 받게 됐다. 영조는 정려문을 세워주라고 명령했다. 부모를 위한 복수가 효도로 평가되던 시대상을 반영하는 장면이다.

오늘날 같으면 아무리 자기 집 선산을 침범했다 할지라도 남의 무덤을 임의로 파헤치고 관을 불태운 일이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또 말에 올라탄 상태에서 칼을 들고 덤벼든 행위도 그럴 소지가 있다. 하지만 옛날 한국인들에게는 부모의 원한을 갚기 위한 그런 복수가 허용됐다. 정려문을 세워준 영조의 조치가 그런 분위기를 증명한다.

지금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에 비해, 10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곧음으로써 원한을 갚으라"는 가르침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시절 한국인들의 귀에는 복수를 만류하는 설매화의 말보다는 거짓으로라도 복수를 응원하는 천 방주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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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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