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르소나 : 이상한 여자> 스틸컷
㈜플레이그램, 태양미디어그룹
03.
극단의 내부적인 사정을 정확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영화는 평범하지 않은 장치 하나를 그곳으로 밀어 넣는다. 서울대 컴퓨터 공학과 졸업생이라는 지원자 혜리의 출신이다. 문제로 삼지 않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지만, 이 배경은 극단 내부에 작은 파문 하나를 일으킨다. 처음 소개될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은 물론이고, 그 배경을 소개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낸다. 첫 회식 자리에서 '예전 선배 중에도 서울대 출신이 많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이유도 그리 호의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작 당사자인 혜리가 자신의 출신을 두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의 구성원이 사뭇 삐딱한 태도인 건 왜 일까. 다른 종에 대한 경계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예술이 열정을 바탕으로 배고픈 사람들이 하는 활동이라고 상정하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메뉴 하나 마음대로 쉽게 고를 수 없는 회식 자리에 극단에 돈 몇 푼 후원한다고 거들먹거리는 박 원장(정형석 분). 심지어 극단의 워크숍을 다녀간 후배 하나는 30만 원이 아쉬워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그런 배경의 집단에 서울대라는 국내 최고 교육기관의 수재가, 그것도 무대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인물이 들어왔으니 언짢게 보일 수 밖에다.
처음 혜리가 보인 솔직한 태도도 문제가 된다. 돈이 없어도 열정 하나로 무대를 이어간다고 믿는, 그것이 자신들의 자존심이라 생각하는 이들 앞에서 해보다 재미가 없으면 그만둘 것이라는 그의 태도다. 이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배경과 강하게 연결되며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으로 이어진다. 혜리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여기에서 배제된다. 고요한 호수에 뛰어든 미꾸라지 한 마리의 몸부림 같은 혜리의 튀는 배경 앞에서 극단의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동질화를 시키는 법' 뿐이다.
04.
"사람들이 다 제각각이라 그래. 보는 시선이나 관점이 다 다르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건 나를 지키는 거야. 나를 잃지 않는 거. 그게 중요하지."
그런 외부적 상황 속에 홀로 놓인 혜리에 대해 영화는 몇 번이고 그가 '이상한 여자'가 아님을 항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재력을 빌미로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며 접근해 오는 박 원장의 흑내. 극단 외부 인물인 옐레나와 나누는 지극히 정상적인 관계 형성. 그를 둘러싼 부정적인 소문과 관계없이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성실히 제 몫을 해내는 이면의 모습. 그리고 혜리의 서사와 떨어진 곳에서 무대와 관계없이 이해에 따라 서로를 힐난하기도 협력하기도 하는 속물적인 이들의 모습(협회장 선거와 관련한)까지 모두 해당된다.
혜리의 속내를 이해해 주는 은정(방은희 분) 또한 집단에 의해 매몰당 할 수 있던 그를 정확히 바라보는 유일한 인물이다. 극단의 선배 연기자로 뒷산에서 처음 만난 그는 일면 혜리와 닮아 있기도 하다. 어느 순간 자신을 잃어버리고 극단의 꼭두각시가 된 것만 같다는 그는 지금의 자신 역시 스스로를 되찾으려 한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남긴다. 곧 혜리를 옥죄어 올 서울대 출신이라는 배경이 거짓이고, 박 원장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극단의 억측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영화 <페르소나 : 이상한 여자> 스틸컷㈜플레이그램, 태양미디어그룹
05.
인물 하나를 두고 일방적인 가해가 일어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 속에 투영되는 극단의 여러 실태는 영세한 집단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다음을 도모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출연료를 미지급했다며 예술인 복지재단에 연출을 신고한 은지나 이 일에 서운함을 토로하는 제작 피디 상원의 사이에 놓여 있는 건 워크숍 형태의 무대라도 만들어 연기를 배우러 찾아온 단원을 수학시켜야 하는 척박한 현실이다. 지인에게 배역 하나를 줬으면 한다고 은근한 청탁을 해오는 후원자 앞에서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 또한 경제적인 자립을 도모하지 못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더 있다. 장 연출이다. 첫 리딩 장면에서 혜리는 오래전 그의 무대를 처음 보고 영감을 얻었으며, 대학의 전공까지 정했다고 말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현실의 풍파에 깎일 대로 깎여 언제나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극단의 대표일 뿐이다. 혜리는 그에게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극단의 내일과 단원의 존속을 책임지고 있는 연출이 자유로워질 방법은 요원하기만 하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외부의 시선에서 '이상한 여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혜리를 신입 단원으로 뽑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관성과도 같은, 언제나 같은 에너지를 가진 집단에 어떤 색다른 동력이자 영감을 불어넣기 위해. 은정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랜 시간 극단의 사정에 파묻혀 자신을 잃어버렸던 장 연출 본인이 다음 작품을 위한 '페르소나'를 구하기 위해.
06.
영화가 보여주는 극단의 길고 긴 사정을 지나 혜리는 메시지 하나를 남긴 채 증발하고, 장 연출은 오래 준비했던 원고 하나를 엎기로 한다. 장면마다 내포된 예술(비현실)과 현실 사이의 간극, 그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의 모습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마지막 자리에 놓인 두 사람의 태도에는 어떤 변화가 움트는 듯하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안고 나아가야 하는 본질이다. 이는 단순히 예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술을 하기 위해 끝없는 성찰과 고뇌 속에 잠겨 있어야 할 당사자와 함께해야 하는 이들과의 관계 또한 포함된다.
영화 <페르소나 : 이상한 여자>가 지금, 이 시점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사실이 여러모로 시의성을 갖는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급변해 버린 콘텐츠 소비문화와 시장의 동향은 영화와 공연계 양쪽 모두를 어려운 시간 속으로 내몬다. 물론 언제나 이런 시기는 존재해 왔고, 그때마다 창작자와 창작 집단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시각을 제시해 내며 산업을 선도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런 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영화 내부)과 '예술에 대한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태도'(영화 외부)를 함께 견지하는 모습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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