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사극 <원경>의 배경인 조선시대가 우리 머릿속에 일으키는 이미지 중 하나는 남존여비다. 조선왕조 500년은 지독한 여성 차별의 시대로 기억된다. 이렇게 된 데는 유교 성리학의 영향도 컸지만, 이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성리학은 조선 건국(1392) 훨씬 전에 안향(1243~1306) 등에 의해 유입됐고, 이 학문을 배운 남성들이 여성들을 무작정 차별하기 힘든 구조가 조선 전기까지 존재했다.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데릴사위제의 나라였다. 사위들은 평생 혹은 몇 년간 처가에 살았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아버지 집인 파주가 아니라 어머니 집인 강릉에서 태어나 한동한 거주한 것 등으로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데릴사위제가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서는 가정 내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아무래도 강할 수밖에 없다. 성리학 이념에 찌든 남성도 처갓집에서 위세를 부리기는 쉽지 않다. 사위가 장인과 연합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처갓집을 끊임없이 경계한 이방원
▲tvN <원경>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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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의 이방원(이현욱 분)은 원경왕후 민씨(차주영 분)는 물론이고 명문 권세가인 처갓집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처가 식구들의 기를 꺾고 권력을 빼앗을 방법을 항상 궁리한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보편적이었던 데릴사위제는 조선 후기에 가서는 많이 약해졌다. 이는 여성의 지위 하락을 초래했다. 성리학 하나만으로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건국 초기에 이방원이 일으킨 대대적인 여성 탄압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조선 전기에 여성의 지위가 갑자기 약해진 배경을 이해하기 힘들다.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사실상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방원은 자신의 정권은 물론이고 후대의 정권까지 공고히 하고자 세 여성의 집안을 순차적으로 몰락시켰다. 왕후와 그 배후의 외척 가문이 왕권을 억압할 가능성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 시작은 작은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폄하와 그 혈육에 대한 탄압이었다.
이방원이 1398년에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은 이성계·정도전 정권에 대한 공격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혈육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방원은 1396년에 사망한 강씨의 혈육인 이방번·이방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 뒤 이방원은 강씨의 무덤에도 분풀이했다. 정릉으로 불리는 이 무덤은 지금의 서울시청 서쪽인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이방원은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1409년에 정릉을 파내 도성 밖으로 내보냈다. 정릉은 그 뒤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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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심리를 반영하는 또 다른 조치는 서얼차별이다. 서얼의 피를 물려받은 정도전이 조선 건국을 주도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이방원 집권 이전에는 서얼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얼의 관직 진출과 결혼을 제약하는 서얼금고법이 이방원에게서 나온 뒤로 서얼차별이 본격화됐다.
이방원은 이복동생인 세자 이방석을 죽인 뒤 이방석을 서자로 규정했다. 이는 이방석의 어머니를 첩으로 폄하하는 일과 연동됐다. 음력으로 태종 16년 8월 21일자(양력 1416.9.12.) <태종실록>은 이방원이 신하들에게 계모란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질문에 대해 '어머니가 죽은 뒤에 새로 들어온 어머니가 계모'라는 답이 나왔다. 그러자 이방원은 "정릉은 내게 계모가 되는가"라고 되물었다. 대답은 '정릉에 있는 강씨는 신의왕후 한씨가 살아 있을 때에 들어왔으므로 계모가 될 수 없다'였다. 강씨는 첩이라는 답변이었다.
이방원이 이 대화를 주고받은 시점은 강씨가 사망한 지 20년 뒤다. 강씨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오래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방원이 신덕왕후를 미워한 것은 그가 낳은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치적 진로를 막는 여성에 대한 이방원의 경계심은 집권 뒤에는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와 처가 쪽으로 옮겨갔다.
민씨 가문 역시 명문 권세가였으므로 이방원의 왕권을 위축시킬 여지가 있었다. 이방원은 이 가문도 몰락시켰다. 이방원 집권기인 1410년에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민무질이 죽임을 당하고 1416년에 또다른 남동생인 민무휼·민무회가 죽임을 당한 일은 민씨 가문의 몰락을 상징한다.
며느리 가문에 대한 숙청작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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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작은어머니의 혈육과 부인의 집안을 몰락시킨 데 이어 며느리인 소헌왕후 심씨의 집안도 짓밟았다. 1418년 9월 9일(음력 8.10)에 왕권을 세종에게 넘기고 상왕이 된 그는 심씨 가문에 대한 숙청 작업부터 서둘렀다.
이방원은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과 작은아버지인 심정이 군사권을 상왕에서 주상으로 옮기려 했다는 혐의를 적용해 세종 즉위년 12월 23일(1419.1.18.) 심온에게 사약을 내렸다. 한마디로, 상왕을 무시하고 주상에게 잘 보이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해 11월 26일자(1418.12.23.) <세종실록>에 따르면, 심정은 교수형을 받았다.
이 기록에는 심씨들이 귀양간 일이 많이 적혀 있다. 심온·심정 형제의 조카도 유배를 가고 서자도 유배를 갔다. 이들 형제의 형인 심도생은 승려 신분인데도 유배를 당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방원은 사돈인 심온의 아내도 의정부 공노비로 만들었다. 이런 형량을 결정한 장본인은 세종이 아닌 상왕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 원경왕후 민씨, 소헌왕후 심씨를 철저히 짓밟은 상태에서 자기 가문의 왕권을 공고히 했다. 이방원의 작은어머니, 아내, 며느리가 짓밟힌 그 위에서 첩과 서얼에 대한 차별이 강화되고 조선왕조의 정치적 기초가 굳어진 것이다.
이방원의 나라가 세 여성의 가문을 짓누르면서 일어선 일은 첩이 아닌 여성들의 지위에도 영향을 줬다. 조선왕조 하에서 여성의 권익이 크게 억압된 것은 이와도 무관치 않다. 제2의 건국을 이룬 군주가 여성들과 그의 가문을 집중적으로 탄압한 일은 이 왕조의 지배 하에 사는 여성들의 처지를 불리하게 만든 시작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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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