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구덕'은 잔인한 주인에게 똥물을 끼얹고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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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전념치료를 주창한 심리학자 헤이즈와 스미스는 책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에서 자기 인식을 세 가지 차원 ▲개념화된 자기 ▲지속적인 자각 과정으로서의 자기 ▲관찰하는 자기로 설명한다. 이 중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를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인식하는 것이 바로 '개념화된 자기'다. 이는 스스로를 '나는 ~다', '나는~하다'라고 규정지으며 '나는 누구예요'라고 소개하는 바로 그 '자기'다.
드라마의 시작 지점 구덕이 들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나는 노비 구덕입니다' 혹은 '나는 옥태영입니다' 둘 중 하나다. 이 질문은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해서 답하기를 원한다. 즉, '개념화한 자기'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덕은 한씨부인(김미숙)의 죽은 손녀를 대신해달라는 뜻에 따라 '옥태영'이 된다. 한씨 부인은 "너는 이제 옥태영이다"라며 스스로를 '태영'이라 여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정말로 구덕은 그 누구보다 다소곳하고 강단 있는 양반집 규수 '태영'으로 지낸다. 주막에서 만났던 태영 아씨의 "나는 아무 노력 없이 많은 것을 가졌으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돕는 게 이치에 맞다"(1회)라는 말을 새기며 외지부가 되어 청수현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다.
하지만,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막심(김재화) 앞에서는 치마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앉아서 큰 소리로 웃는다. 옥에 갇혔을 땐 쥐들을 보고 "내가 너희들을 무서워할 줄 알아? 나 구덕이야"라고 독백한다(9회). 이럴 때 구덕은 여전히 '구덕'이다. 자신을 잡으러 다니는 소혜를 만날까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 역시 '구덕'이다.
구덕은 이렇게 두 가지 이름을 오가며 생활한다. 하지만, 침착한 겉모습과는 달리 늘 불안해하고, 행복한 순간들이 달아날까 봐 두려워한다. 이는 아마도 스스로를 '구덕' 혹은 '태영' 어느 쪽으로도 명료하게 개념화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행복한 모습인 '태영'으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게 될까 봐 더 불안해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우리는 '나는 누구다'라고 규정할 수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이는 무엇이든 언어로 표현해야 명확하게 실체를 느끼는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직업이나 역할로 자신을 개념화하거나('나는 교사다', '나는 엄마다') '나는 밝은 사람이다'처럼 어떤 특징으로 자신을 규정짓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규정한 모습'으로만 지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사다'라고 개념화해도 교사가 아닌 채 있는 시간이 더 많고 '나는 밝은 사람이다'라고 여겨도 어둡고 우울할 때가 반드시 있다. 개념화한 나만을 인식한다면 규정한 자신과 다른 자기 모습을 만났을 때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때로는 개념화한 모습에 갇혀 오히려 진짜 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지속적인 지각 과정으로서의 자기
▲태영은 외지부로 활약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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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속적인 지각 과정으로서의 자기'이다. 이 자기는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느끼는 나의 상태를 '나'로 인식한다. 쉽게 말해 '경험하는 나'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속 구덕이는 노비든 양반집 마님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이 있다. 식솔들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하고, 억울한 누명을 쓴 청수현 사람들의 사연에 공감하고, 외지부로서 힘없는 이들을 돕고, 서인(추영우)을 연모하는 행동과 마음 하나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 '자기'는 굳이 옥태영인지 구덕이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내가 '나'인 것이다.
'개념화된 나'는 머릿속에 존재하지만 '경험하는 나'는 지금 여기서 실재한다. 이 경험하고 지각하는 내가 없으면 개념화된 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경험하는 것들은 계속 변하고 명확히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종종 잊곤 한다. 하지만, 이 '경험하는 나'를 인식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좀 더 유연하게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스스로 규정한 모습에 새롭게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인식을 더 해 자기 개념을 확장해 갈 수 있다.
'개념화된 자기'로만 생각하면 구덕과 태영 둘 중 하나는 거짓이 된다. 하지만, '지속적인 지각 과정으로서의 자기'에서는 둘 다 가짜가 아니다. 청수현을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내어놓고, 외지부로서의 일을 사랑하고, 동시에 노비출신임을 들키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 그 자체가 구덕이자 동시에 태영이기 때문이다.
관찰하는 자기
▲태영이 된 구덕은 청수현 사람들을 도와 존경을 받는다.JTBC
하지만, 경험은 늘 달라지고, 감정도 수시로 변한다. 무언가 계속 변하는 나를 일관된 나로 인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관찰하는 자기'가 존재한다. '관찰하는 자기'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변하지 않고 나를 인식하고 있는 자기를 말한다. 이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고, 일상에 매몰되어 있을 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서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관찰하는 자기'의 존재를 자각하고 나면 변하지 않는 자기의 핵심에 닿을 수 있다.
일기 써본 기억을 떠올려보자. 일기 속에는 오늘 어떤 행동을 한 나 (경험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개념화된 자기)가 들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나'도 있다. 일기를 쓰면서 나의 모습을 관찰하는 '나'가 바로 '관찰하는 자기'이다.
노비 시절의 구덕과 태영으로서의 구덕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누더기를 입고, 툭하면 주인에게 매를 맞고, 굶주려야 했던 구덕은 태영으로 살면서 비단옷을 입고, '마님'소리를 들으며 몸종의 시중을 받는다. 하지만, 구덕은 완전히 다른 일상을 살면서도 두 가지의 삶 모두가 '나'였음을 기억한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를 관찰하는 자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덕은 외지부로서 활동에 태영 아씨의 뜻뿐 아니라, 자신이 노비시절 겪었던 어려움을 비춰보며 '자기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 낸다. 11회 구덕은 "훌륭하다"는 승휘의 말에 "저는 힘들게 살아봤으니 저들이 힘들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지요" 라고 답한다. 이는 외지부로서 청수현에서 했던 일들이 단지 '태영 아씨'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합해 해낸 일이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다시 <옥씨부인전> 첫 장면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누구인지 답하기 어렵다고 과연 구덕이 '가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개념화된 자기의 측면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다른 자기들을 떠올려보면 그녀는 누구보다 진실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구덕은 어떤 이름으로 불렸든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잊지 않고, 부당함을 겪는 사람들을 도우며, 양심을 지키며 살아왔다. 또한, 이 모든 것을 성찰하고 통합해 냈다. 그러므로 구덕의 삶은 그 자체로서 '진짜'였다.
우리 역시 그렇다. 지금의 내가 진짜 나로 살고 있는지 종종 의문이 들곤 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맡게 된 역할로서만 나를 인식할 때 갑갑하고 나답지 않다 느껴지기가 쉽다. 그럴 때 '개념화된 자기'에만 집중하지 말고 현재 내가 느끼는 것, '경험하는 자기'에도 주의를 기울여보자. 또한 이런 고민을 하고 스스로를 '관찰하는 나'도 느껴보자. 그럴 때 '규정된 나'를 넘어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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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옥씨부인전' 임지연을 보라, 현명한 처세술은 이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