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나라는 실질적으로 조선 제2왕국이다. 이방원 정권은 건국 6년 만인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소멸시키고 허수아비 임금인 정종을 앞세우다가 1400년부터 이방원의 이름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이방원은 유혈 정변을 통해 이성계 정권을 전복했다. 이 하나만으로도 이성계 정권과 이방원 정권은 연속성을 갖기 힘들다. 그런데 이방원은 형식적으로는 이성계를 계승하는 듯이 했다. 그래서 이방원의 나라와 이성계의 나라가 연속성을 갖는 듯이 보였지만, 실질적 측면을 보면 두 나라의 색깔은 달랐다.
원경왕후 민씨와 그 남편 이방원의 갈등을 다룬 tvN 사극 <원경>은 이 부부의 관계와 더불어 이방원과 그 아버지 이성계의 관계도 비중 있게 다룬다. 드라마 속의 이방원(이현욱 분)은 아버지 이성계(이성민 분)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아버지가 정권 탈환을 노리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한다.
드라마 속의 이방원은 그런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하다가도,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행동에 나서 아버지의 기를 꺾는다. 드라마 속의 이성계는 그런 아들에 대한 증오심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 산다.
<원경>에서도 두 부자의 갈등이 많이 강조되지만, 실제의 이방원 부자는 이 드라마에 묘사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차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갈등의 수준도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이방원의 갈등
▲tvN <원경> 관련 이미지.
tvN
이성계가 삼봉 정도전과 함께 운영한 조선과, 이방원이 하륜·권근 등과 함께 운영한 조선은 국호는 동일하지만 내용은 많이 달랐다. 정도전의 진두지휘하에 요동정벌(만주정벌)이 추진된 데서도 나타나듯이 이성계 정권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땅인 만주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표출했다. 이성계 정권의 요동정벌은 내부 혼란을 수습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띠었지만, 그 동기가 어떻든 국가 시스템 차원에서 실제로 시도된 것은 사실이다.
만주로 갈 것인가 한반도에 머물 것인가가 쟁점이었던 묘청-김부식의 대결은 묘청의 난(1135)을 계기로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한민족이 국가적 차원에서 요동 지배에 대한 의지를 표시한 사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고려 우왕 때와 조선 이성계 때를 제외하면, 묘청의 난 이후의 역대 정권들은 김부식 노선을 추종했다. 조선 효종 때에는, 군주는 북벌 의지를 드러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성계 정권은 묘청 노선을 따르고, 이방원 이후의 역대 정권은 김부식 노선을 따랐다는 점에서도 이성계 정권과 이방원 정권은 차별성을 띤다.
충신의 아이콘 된 정몽주
▲tvN <원경> 관련 이미지.tvN
이방원 정권은 포은 정몽주를 충신의 아이콘으로 띄웠다. 조선 건국을 가장 격하게 반대한 인물 중 하나인 정몽주가 충신의 대명사로 부각되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음력으로 태종 1년 1월 14일자(양력 1401년 1월 28일자) <태종실록>은 이방원이 권근으로부터 정몽주 띄우기에 관한 아이디어를 듣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성계의 건국을 반대한 정몽주가 이방원 정권 하에서 1등 충신의 이미지로 거듭나는 순간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건국을 지지한 인물 중에서 국가적 롤모델을 찾지 않았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기는 했지만, 정몽주가 가장 크게 반대한 대상은 이성계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우왕 정권을 전복할 때는 이성계를 지지했지만, 이성계가 건국시조 자리에 욕심을 드러내자 태도를 바꿨다. 그런 정몽주를 충신의 상징으로 띄운 것은 아버지에 대한 이방원의 간접적 모독의 의미도 띠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고려 기득권층,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의 일원이지만 역성혁명을 반대한 정몽주 라인을 억누른 상태에서 음력으로 임신년 7월 17일(1392.8.5)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조선 건국을 가장 격렬히 반대한 세력은 이성계의 즉위 직후에 징계를 받거나 사법처벌을 받았다.
그해 7월 28일자(양력 8.16) <태조실록>에 따르면, 건국 직후에 그런 징계나 처벌을 받은 사람은 총 56명이다. 이날 반포된 즉위교서에서 이성계는 우현보·이색·설장수 등의 직첩을 회수하고 작위 없는 서인(庶人,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강회백·이숭인·이래 등에게는 직첩 회수와 곤장 100대 및 유배형을 선고했다. 곤장 70대 및 유배, 직첩 회수 및 유배 등의 처벌도 있다.
2000년에 중앙대 박사학위논문으로 나온 유주희의 '조선 태종대 정치세력 연구'에 집계된 바에 따르면, 대표적인 반체제세력인 그 56명 중에서 우현보·설장수 등 15명은 이성계 정권과 화해하거나 이 정권의 관직을 받았다.
이방원 집권기인 정종 정권과 태종 정권하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16명 더 생겨났다. 일례로, 정종 2년 1월 28일자(1400.2.22.) <정종실록>에서는 위의 이래(李來)가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라는 관직과 함께 언급된다. 태종 2년 7월 22일자(1402.8.20.) <태종실록>은 강회백이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에 임명됐음을 알려준다. 이 16명의 가세로 조선 건국을 지지한 전향파는 총 31명으로 불어났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건국 반대파로 낙인찍힌 56명의 과반수인 31명이 정치적 복권을 이룬 상태에서 이방원의 정종·태종 정권이 운영됐다. 이는 이방원 정권이 조선 건국을 찬성한 세력과 조선 건국을 반대한 세력이 연합하는 형식으로 작동됐음을 보여준다.
이방원의 조정에는 조선을 반대했던 세력이 상당한 비중을 갖고 포진했다. 체제를 부정했던 세력이 이성계 때보다 훨씬 많이 포함됐다는 점에서도 이방원의 나라는 이성계의 나라와 많이 달랐다.
혈통상으로나 형식적으로 보면, 이성계와 이방원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기 쉽지만 국정운영 스타일이나 인적 구성이 달랐던 것이다. 이방원이 운영한 정종 및 태종 정권은 이성계 정권을 전복하고 그 위에 세운 사실상의 새로운 나라였다. 이방원의 조선은 실질적으로 '제2왕국'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원경' 속 이성계-이방원 갈등, 실제로는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