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니멀 킹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05.
"명심해. 여기선 각자 살아야 해."
잠시 돌아와서, 수인화가 시작된 에밀이 픽스(톰 메르시에 분)를 만나고, 날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그를 돕기로 하는 과정은 영화 전체의 시점을 바꾸며 또 하나의 내러티브를 완성한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과 달리 인간의 시선이 아닌 수인의 쪽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통해서다. 여기에는 자신의 현실을 이제 막 받아들이기 시작한,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고자 하는, 자유를 찾되 인간의 터전에서 벗어난 곳에 있고자 하는 이들의 현실과 노력이 존재한다. 모든 규칙이 인간의 쪽에서 설정되고 집행되던 시점에서는 조금도 가늠할 수 없던 장면이다.
자신을 격리한 의사들이 다짜고짜 수술해 버렸다는 픽스의 말 앞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지켜봐 왔던 인간의 모든 말에 의심을 품게 되기까지 한다. 에밀 부자가 면회에 앞서 만난 의사가 했던 말을 모두 믿을 수 있을까? 엄마 라나는 보호소 안에서 과연 픽스와 다른 대우를 받았을까? 사고로 알려졌던 호송차의 전복은 과연 사고였을까? 등의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수인화와 변이에 반감을 품던 학교 친구들의 태도와 보호소의 담벼락을 따라 쓰여있던 '짐승 수용, 결사반대'의 부정적인 구호 등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변이를 확인한 에밀이 수인 무리 앞에서 되려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06.
서로 다른 이유로 경계인이 되어버린 부자는 아들 에밀의 수인화 진행이 드러나면서 갈등을 겪게 된다. 아내에 이어 아들까지 잃을 수는 없는 프랑수아와 엄마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 똑똑히 지켜본 에밀의 뜻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물고, 아버지는 가위의 날 끝으로 아들의 목을 위협하는 정도까지 이르는 이 갈등은 단순하지 않다. 수용소가 필요할 정도로 수인이 많다는 것은 이 부자와 유사한 상황에 놓인 가정 또한 그만큼 존재한다는 뜻이다. 프랑수아가 일하는 가게의 주인 동생도 수인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 역시 영화의 명백한 의도 안에서 계산된 부분이다.
마을의 축제 도중 사람들에게 쫓겨 에밀이 숲으로 향하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입장에서 수인을 포획하지 않는 일은 부정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수인 쪽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양쪽 모두를 생각하자면, 일방적으로 끌려가 감금당하고 실험당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신(Scene)이 영화 전체의 커다란 온점이 된다.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어느 누구도 경계에 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감독의 생각이 내포되어 있어서다.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과 그 이해가 누군가를 잃게 만든다는 점이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제 애니멀 킹덤(The animal kingdom)과 같은 동화적인 공간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픽스의 추락하는 날개와 함께 모든 것이 신기루가 되어 흩어진다. 가족을 되찾겠다던 프랑수아의 소망도 역시 마찬가지다. 훗날, 이들을 쫓고 박멸하는 인간들은 변이를 경험하거나 수인화로 가족을 잃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글쎄다.
▲영화 <애니멀 킹덤> 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주)
07.
수많은 상상과 은유를 건너오기는 했지만, 결국 영화 <애니멀 킹덤>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영화가 완성하지 못한 이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다시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일이다. 이종(異種)과의 공생,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 성장과 개발로만 치닫고 있는 인류가 지나온 모든 걸음에 대한 화해와 회복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박멸이나 격리, 말살과 절멸이 해답이 될 수 없는 이유 또한 간단하다. 우리 또한 전체의 하나로 존재하고, 종(種)의 일부라는 것. 사랑은 분명히 그곳에 존재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관을 빠져나온 우리 모두는 지금, 아내 라니의 수인화를 경험했고, 아들 에밀의 또 다른 수인화를 마주한 프랑수아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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