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대통령의 내란 획책으로부터 탄핵, 다시 극우파의 준동에 이르는 참담한 뉴스들이 연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세상의 관심이 오로지 이를 가리키는 동안 민생이며 국가의 미래와 밀접히 엮인 수많은 이야기가 조명 받지 못하고 스러진다.
며칠 전 만난 어느 탐사보도 매체 관계자는 부족한 인력에도 화제성 있는 내란 소식을 놓치지 않으려 그간 준비해왔던 다른 보도 여럿을 멈출 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때가 중요한 보도들은 그대로 멈추었다는 후문이다. 어디 그 하나만의 이야기일까. 한반도를 둘러싼 세상은 시급하게 변하는데 한국은 여기 이대로 멈추어서 무도한 대통령의 처벌을 놓고 갈라져 국가의 역량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정권이 집권한 동안 한국이 북한과의 소통채널을 완전히 잃어버렸단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또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 격화를 비롯하여 블록화된 한반도 주변 정세는 한국과 북한 사이의 틈을 한껏 벌려두고야 말았다. 일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독립대표부를 출범해 상호협력을 한층 공고히 하기로 했다. 북한은 스페인으로부터 핵무기 제조용 장비를 들여온 사실이 알려져 국제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러우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사실 또한 공식화했다. 한반도 주변의 상황이 점차 평화를 장담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실미도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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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복판에서 벌어진 충격적 사건
1월 21일은 남북 분단의 아픔을 되새겨 마땅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인 1968년 1월 21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청와대 지근거리까지 침투했다 사살된 날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1.21사태, 김신조를 위시한 31명이 침투하여 29명이 사살되고 1명이 투항한 일대 사건이었다.
1월 16일 북한 내 기지에서 출발한 이들은 1월 21일 저녁 서울 중심지에 진입한다. 그리고 무장공비가 남하했다는 신고에 따라 비상순찰 중이던 경찰에 적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투는 북한 공작원 29명 뿐 아니라 한국군 25명과 민간인 7명 등 32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실미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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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는 남북은 물론 한반도와 주변국 사이의 관계까지 경색시킨 일대 사건으로, 박정희와 김일성 모두가 이 사건을 각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한국은 무장공비가 서울 복판에 침투했다는 사실로부터 이에 대항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는데, 도심 곳곳에까지 병영을 설치하고 향토예비군과 대북침투 특수부대를 창설했으며, 사회 전반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그럼에 박정희가 향후 개헌과 장기적 독재를 이어가는 데 있어 이 사건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이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한국에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이정규의 <돼지들>과 백동호의 <실미도>는 1.21 사태의 반작용으로 북에 파견하기 위해 양성한 공작원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이중 <실미도>는 몇 차례 부침 끝에 영화화되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쉬리>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시대를 상징하는 대단한 성공작이 된다. 강우석이 감독한 영화는 2003년 12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다.
<실미도>는 백동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함에도, 순수 창작물이라 보는 편이 더 적합한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 또 몇 가지 설정을 빌렸을 뿐, 더욱 극적으로 꾸미기 위하여 이야기 대부분을 새로 창작한 것이다. 주인공인 강인찬(설경구 분)은 깡패 출신 범죄자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는 사형을 면하는 대가로 국가의 제안을 받아 외딴 섬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그와 같은 이들 여럿과 함께 특수한 훈련을 받게 된다. 바로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오는 게 그들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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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병기로 키워진 31명의 전사들
부대장 최재헌(안성기 분)의 지휘 아래 중사 조돈일(허준호 분) 같은 간부들이 억센 사내들을 단숨에 휘어잡고, 이들에게 병사 하나마다 기간병 한 명을 붙여 지독한 훈련을 시행하는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삶이 있다는 회유는 너무나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유일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결국 무엇에나 적응하는 동물, 실미도에서의 혹독한 훈련에 이들은 어느새 익숙해진다.
3개월의 지옥훈련을 거친 이들은 인간병기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존재다. 똑같은 조건이라면 기간병들조차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다. 그대로 북한에 침투한다면 1968년 1월 21일 있었던 김신조 일당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일 것이 예상될 정도. 새로운 삶을 얻어내겠단 부대원들의 각오와 이를 북돋는 교육대장 최재헌의 독려가 이 같은 변화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영화는 예고된 비극으로 향한다. 1950년 한반도에 전화가 일고, 1968년 두 나라가 불화했던 것처럼, 1972년 두 나라 사이에 급작스러운 훈풍이 불어온 것도 두 나라의 의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고전하던 미국이 향후 자유진영의 위기를 당사국이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새로운 기조, 즉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며 공산진영 국가들과 화해를 시도했고, 소련이며 중국과 회담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한반도 또한 그와 같은 압력 아래 놓여 박정희와 김일성이 마침내 회담 날짜를 잡게 되니, 몇 년 전 서로를 죽고 죽이겠다며 창설한 부대가 하루아침에 쓸모가 없어진다. 실미도 부대 또한 그와 같은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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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비극을 향하여
최재헌의 간곡한 요청에도 상부는 실미도 부대의 실전투입을 허가하지 않는다. 오로지 출정만을 위해 3년여를 참아낸 이 부대 안에 더는 버텨낼 수 없다는 압력이 한계치까지 차오르기에 이른다. 잊혀진 부대가 되어 다른 어떤 임무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실전 투입이며 전역조차 허가되지 않은 이들은 마침내 칼끝을 반대로 돌리기에 이르는 것이다. 김일성이 아닌 저들의 운명을 망가뜨린 이들을 향하여서.
영화는 실미도 부대가 실미도에서 반기를 들어 부대장 이하 기간병들을 죽이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잡아낸다. 마치 김신조의 부대원들이 그러했듯, 군경의 저지에 가로막혀 저항하다 사살되고 자폭하는 이야기가 긴장감 넘치게 그려진다. 그저 전쟁영화나 액션영화라 치부할 수 없다. <실미도>의 배경엔 엄존하는 한국의 분단된 현실, 또 독재정권의 야욕과 무신경한 국정운영이 자리하고 있는 탓이다.
<실미도>는 국가권력이 개인에게 가한 폭력을 극적으로 비춘다. 역사를 아는 이들은 그와 같은 비극 저변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압력이 존재함을 안다. 엄존하는 현실 가운데 무도한 국가가 그중 가장 약한 이를 어떻게 대우할 수 있는가를 돌아보는 건 그와 같은 비극을 막는 경계석이 될 수 있는 일이다. 벌써 개봉 22년이 된 <실미도>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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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한국 최초 천 만 영화, 인간병기 31명의 예고된 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