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SF, 좀 더 적나라한 표현으론 발냄새 SF.

영화 <미키17>의 봉준호 감독은 20일 오전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풋티지 시사 및 간담회에서 이 같은 표현을 썼다. 영화 <기생충> 이후 약 6년 만에 관객과 만나는 봉 감독의 신작엔 배우 로버트 패틴슨, 마크 러팔로, 스티븐 연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합류해 더욱 기대감을 높였던 상황.

총 30분 분량으로 서로 다른 시퀀스들이 엮인 풋티지엔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딱한 사연이 주 내용이었다. 절친 티모(스티븐 연)와 사채를 끌어다 마카롱 가게를 차렸지만 곧 파산 위기에 내몰리고 죽음 직전 지구를 떠나기 위해 인공 위성 익스펜더블(소모품) 프로젝트에 자원하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었다.

기발한 상상력에 더한 현실감

 배우 로버트 패틴슨과 봉준호 감독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미키 17'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배우 로버트 패틴슨과 봉준호 감독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미키 17'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그대로 복제해 재탄생 시키는 기술로 미키는 매번 위험한 임무에 내몰린다. 뒤에 부튼 17이라는 숫자는 말대로 열일곱 번째 프린팅됐다는 뜻이다. 영화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키17 이후 미키18이 프린트되면서 극적 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애드워드 애쉬턴의 소설 <미키7>이 원작이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미키7이 아닌 17이다. 그리고 역사가라는 설정이 마카롱 가게 사장으로 바뀌었다. 그간 자신의 작품에서 서민 계층,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내세워 사건을 끌어온 봉준호 감독과도 어울리는 지점이다. 미키를 두고 봉준호 감독은 "힘 없고 불쌍한 친구"라고 표현했다.

"여러 SF영화에서 본, 복제가 아닌 사람을 정말 프린터기로 뽑듯 출력하는 게 원작 소설의 핵심이다. 그 자체로 비인간적인데, 그 중에서도 미키는 가장 극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기도 하다. 계급 투쟁이라는 정치적 깃발을 들고 영화를 만들진 않았지만 미키가 얼마나 불쌍한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7번 죽는 건 충분치 않았고, 죽어 나가야 하는 게 일이었던 만큼 10번은 더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단 걸 좋아하는데 마카롱이나 다쿠아즈를 커피와 자주 먹는다. 원작에선 미키가 역사 선생님이라 지적인 이야길 많이 한다. 하드 SF라는 장르기도 해서 과학 설명이 엄청 많은데 제가 과학에 큰 관심 없다 보니 땀 냄새 나는 이야기로 채웠다. 제 영화에 그간 힘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이 주로 나왔는데 그런 인물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해내고 고군분투하는 데서 드라마가 나오잖나. 그래서 약하고 문제 많고 불쌍한 캐릭터에 끌리는 것 같다."

로버트 패틴슨도 캐릭터 설정과 구현 과정이 재밌었음을 강조했다. 봉준호 감독을 두고 "모든 배우들이 가장 작업해 보고 싶은 감독 중 한 분인데 아마 지금 전 세계에 그런 감독이 네 다섯분 정도 일 것"이라며 애정을 드러낸 그는 "아주 예전에 <살인의 추억>을 봤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심각한 상황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게 멋졌다. 저랑 하고 싶다는 말씀에 재빨리 손들었다"고 출연 계기부터 밝혔다.

"배우들은 뭔가 한계에 도전하게 하는 분과 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님이 그렇다. 숲에서 사냥하듯 많은 배우들이 그런 감독님을 찾고 있는데 제겐 봉 감독님 영화가 눈에 띄었다. 감독님은 항상 체계적이고 자신감 넘치신다. 촬영하면서 스스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현장 편집본도 보여주시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사실 미키는 스스로 루저라 생각하며 인생이 흐르는대로 두는 사람인데 미키18을 만나게 되면서 본인이 그간 삶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깨닫는다. 사실 18은 뇌의 일부가 프린트되지 않은 존재다. 잘못 프린트된 존재가 마치 미키17의 잠재된 자아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17을 일깨워주는 무서운 형과 같은 존재랄까."

개봉일 변경 이슈는 외부적 상황

 봉준호 감독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신작 영화 '미키 17'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신작 영화 '미키 17'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은 마크 러팔로를 언급하기도 했다. 마크 러팔로는 <미키17>에서 배우 인생 사상 처음으로 악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재자로 묘사된 해당 캐릭터에 대해 봉 감독은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유형의 독재자인데 좀 멍청하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며 "그 매력 때문에 군중을 사로잡는데 바로 그 지점 때문에 무서운 인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처음에 마크 러팔로에게 제안했을 때 그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자기에게 이런 면이 있냐며 묻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현장에선 즐겁게 임하시더라."

휴먼 프린팅이라는 설정 관련, 현재 직면한 AI 활용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봉준호 감독은 "알파고를 굴복시킨 이세돌 바둑기사처럼, 저도 세 페이지마다 한 번씩 AI가 절대 쓸 수 없는 내용을 넣으려 한다"며 "이번 영화엔 제 25년 감독 경력 중 처음으로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음악감독 정재일씨가 사랑 노래 테마도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미키17> 개봉일을 두고 지난해부터 설왕설래한 사연도 언급됐다. 배급사 워너브라더스 측은 해당 영화를 1월 말 개봉하는 걸로 고지했다가 4월 18일로 변경, 다시 최종적으로 3월 7일 개봉(북미 기준)한다고 알렸다. 이에 대한 여러 추측 기사가 나온 것에 봉준호 감독은 "제 영화들 중 개봉 날짜가 변경 안 된 게 한 번도 없긴 하다. <살인의 추억> 때도 그랬고 아무래도 이번 영화가 주목을 많이 받아 기사가 많이 나왔던 것 같다"며 "배우 조합 파업 여파도 있고 복잡한 외부 상황이 엮여 있었다. 하지만 재편집이나 재촬영은 없었다. 워너 측도 제 권한을 존중해줬다"고 알렸다.

한편 로버트 패틴슨은 이제야 한국에 처음 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랍다는 감회를 전하며, "정말 한국에서 거주할 아파트를 찾고 있기도 하다"고 재치 있게 말했다. 한국에 정착한다는 추측성 기사가 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어 그는 "한국영화산업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앞으로 한국작품을 더 경험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영화 <미키17>은 오는 2월 28일에 한국에서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한다. 북미 개봉은 3월 7일이다.

미키17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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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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