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본다. 만약 성폭행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간 일구어온 커리어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평온한 일상을 내던지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감히 나설 수 있을까.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억울함의 해소보다, 사는 내내 '성폭행당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두려움이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로 인정받건 아니건, 그 일을 겪은 여자라는 상상이 늘 자신보다 먼저 당도해있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까.

성폭행 범죄를 숨긴 한 여자가 결국 아웃팅으로 파멸되는 과정을 애플 오리지널 드라마 <디스클레이머>가 그렸다. 꽤 성공했고 중산층의 가정을 꾸려왔지만 "솔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성폭행을 당하고 그 피해를 밝히고 말고는 철저히 피해자의 몫이지만, 마치 만인에게 고지해야 했던 어떤 진실을 숨긴 거짓말쟁이로 취급된다. 진실을 밝힌다고 해서, 편견 없이 그의 진술에 귀 기울이지도, 그대로 믿어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여자의 정조를 의심하고 통제하려는 남자들

 애플 오리지널 드라마 <디스클레이머> 관련 이미지.
애플 오리지널 드라마 <디스클레이머> 관련 이미지.애플

드라마는 주인공 캐서린(케이트 블란쳇)이 처한 피해자라는 입장이 얼마나 쉽게 불신임되고 혐오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해자 엄마 낸시(레슬리 맨빌)의 관점으로 서술된다. 낸시는 아들 조나단(루이 파트리지)이 여행 중 익사하자 그 상실을 대속할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때 아들이 남긴 야릇한 사진 속 여자는 아들을 유혹해 죽게 만든 '꽃뱀'으로 적합했다. 죽은 아들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으로 건강을 잃고 아들의 방에 은둔하면서 마침내 원수를 처단할 최종 병기 책을 완성한다.

남편 스티븐(케빈 클라인)은 낸시가 사망한 후 유품을 정리하다 아내의 최종 병기를 찾아내고 복수를 결행한다. 복수심은 아무런 낙이 없던 스티븐의 삶에 묘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내의 유작을 출판하고 본격적인 복수 각본을 실행한다. 캐서린에게 책을 보내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협박하고, 가정과 직장 양방향으로 그녀를 매장시키기 위해 진력한다.

낸시와 스티브의 아들 잃은 애통하지만 일방적인 진술에 이입하게 되는 시청자는 균형감을 잃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험에 들어가고 넘어간다. 유부녀가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순진한 어린 남자를 유혹해 마침내 죽게 만들다니, 지탄받아 마땅한 일 아닌가.

마침내 캐서린이 어서 단죄되기를 바라던 시청자는 마지막 반전으로 그들의 진술이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감지하며 허둥 되게 된다. 낸시와 스티브의 일말의 흠결도 없어 보이던 진실이 결국 오인된 사실이었음과 지금껏 드라마에서 캐서린의 입장이나 진술이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이를 간과한 채 그들이 만들어낸 서사에 격하게 공감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가. 우리 사회에서도 유통되는 익숙하고도 공고한 여성 혐오 경로이지 않은가.

스티브의 모략으로 붕괴되는 사회적 위치와 함께 캐서린을 더욱 궁지로 몬 사람은 타인이 아닌 남편이다. 남편 로버트(사샤 바론 코헨)는 배달된 책과 사진을 보고 일고의 의심도 없이 낸시와 스티브의 주장을 믿고 캐서린을 내쫓는다. 캐서린의 입장을 단 한 번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채 그녀를 간음녀이자 살인자로 확정한다.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스틸 이미지.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스틸 이미지.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여자의 정조를 의심하고 통제하려는 남편들의 가부장성이 동서고금을 막론한다는 것은 14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디스클레이머>가 일방의 입장을 길게 보여주며 진실이라고 믿게 만든 반면, <라스트 듀얼>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같은 사건을 세 인물의 입장에서 반복해서 재현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남편의 부재를 틈타 범죄를 노린 남자에게 강간당한다. 그녀는 "저는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강간 피해 사실을 용감히 밝히지만 남편조차 믿지 않는다. 남편에게는 진실도 아내의 피해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소유물인 아내의 정조가 훼손당함으로써 더렵혀진 자신의 명예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다. 이것이 남편이 아내의 강간 피해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현재라고 다를까. 14세기, 남편이 아내의 강간 피해를 입증할 방법으로 궁리해낸 것이 아내의 목숨을 담보로 결투를 벌인 것이라면, 현재의 남편은 아내를 간음녀로 확정하고 가해자와 긴밀히 내통하며 아내의 부정함을 험담하고 파멸을 공모함으로써 자신의 명예와 안전을 지켰다.

여성이 성폭행 피해를 드러낼 수 없는 이유

위 드라마나 영화 못지않은 일이 현실에서도 있었다. 근대 문인 김명순은 일본 유학 시절 데이트하던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를 비관해 자살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를 방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했다. 조선에 돌아와 재기하려 애쓰던 그녀는 출중한 실력으로 좋은 평을 들으며 문단에 데뷔했지만, 그녀를 시기하던 남성 문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김명순 죽이기'에 돌입했다.

김기진을 필두로 김동인, 차상찬, 신형철, 방정환이 가세해 그녀의 성폭행 피해를 들추며 모욕했다. 이는 어떤 사실적 피해도 누가 어떤 의도로 말하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실로 탈바꿈되며 2차 3차 가해로 이어지는 가공할 폭력으로 이어짐을 시사한다.

김명순은 남성 문인 연대의 모함과 저주와 혐오를 견디며 절규했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그녀의 저항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서 한국군이 된 강간 가해자 이응준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그녀를 두 번 세 번 죽인 남성 문인들은 평생 명예를 누렸다. 이런 부정의와 구조적 폭력이 여성이 성폭행 피해를 드러낼 수 없는 이유 아닐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게기 예정
애플오리지널드라마디스클레이머 라스트듀얼 성폭력피해 여성혐오 진실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